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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in 문화人] 취묵헌 인영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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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묵헌 인영선 선생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의 인생을 만족하지 못하는 듯 하다. 다음 인생은 자유로운 ‘개팔자’로 살아보고 싶어하기도 한다. [조영회 기자]

“췌장이 다 녹아서 요즘엔 술도 못 먹어.” 주량이 어떠하냐 물으니 안쓰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가끔 한 두 잔씩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단다. 대화가 뜬금없는 술타령으로 시작됐다. 필호가 취묵헌(醉墨軒)이니 적당한 물음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천안이 낳은 대표 서예가 인영선(64) 선생을 그의 작업실 이묵서회(以墨書會)에서 만났다. 그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필이다. 시(詩)서(書)화(畵)에 능하다.

둘로 나눠진 공간 중 널찍한 곳은 제자들이, 그보다 작은 곳이 자신의 작업실이다. 큰 글이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판 작업대에 앉아 그와 차를 나눴다. 세상사는 얘기도 하고, 자신의 가족 이야기도 간간히 꺼내 놓았다.

주위는 온통 글과 그림이었다. 중간에 있는 작업대에는 크고 작은 붓들이 풍경(風磬)처럼 걸려있었다. 묵향(墨香)이 코를 찔렀다. 40년 가까이 먹과 붓이 함께 있었던 방이니 오죽하랴.

이 서실은 1972년 ROTC 장교 제대 후 만들었다고 했다. 당시 지방에서는 서실을 보기 힘들었다. 천안도 마찬가지였다. 이묵서회가 첫 서실이었을지 모른다.

3살 때 처음 붓을 만져본 그가 본격적으로 서예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방문했던 한 장학사가 그에게 서예를 지도해주면서다. 환경미화를 위해 쓴 글씨가 그 장학사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사실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도 한문에 능했다. 경희대 국문과에서 수학(修學)한 것도 그의 ‘글씨’에 큰 영향을 줬다.

작품-雲無心千載吾師(구름 무심하기 천년 나의 스승이로다)

평생을 붓과 함께한 그지만 쉽게 붓을 들지 않는다. 평택에서 대통령 모내기 기념정자를 세울 당시 현판의 글씨를 부탁받았지만 글쓰기를 거절했다. 또 한번은 한 대학의 학장이 작품을 요청했을 때도 단칼에 잘랐다. ‘청탁한 사람이 직접 와서 부탁하지 않아 무례하다’는 것이다.

반면 마음이 가는 자리라면 기꺼이 붓을 놀린다.

천안 불당동 시청사의 현판, 천안종합운동장, 천안문화원, 한국기술교육대의 교훈(實事求是) 등 곳곳에 걸려있다. 박문수 유물관 유관순 열사 기념관 등 역사의 흔적에도 함께한다.

취묵헌 선생이 붓을 놀리는 모습

작품은 주로 전서(篆書)와 행초(行草)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중 전서의 행의서사(行意書寫)는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신만의 글씨 ‘취묵헌체’에 대한 욕심을 물었더니 후대 역사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의 붓은 명쾌하다. 세상을 즐겁게 바라보기도 하고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염세주의자의 눈이 거칠게 쏘아보기도 한다.

‘오뉴월 개팔자라 이르건만 丙戌年 개는 어이 이리 바쁜가

너는 한번 개팔자로 한바탕 멋지게 살아보려므나’

그의 작품 ‘견공(犬公)’의 글귀다. 글과 함께 개도 한 마리 그려 넣었다. 병술년에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멋들어지게 비판하고, 유유자적한 ‘개팔자’의 꿈을 그려봤다. 남들이 보기에 멋진 인생을 살았건만 자신이 살아온 길에 특별한 만족은 붙이질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작품-黃龍寺 小影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稚)’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유치하지 않다’ 취묵헌이 가장 좋아하는 글귀다.

회갑을 맞아 발간한 작품집 유희한묵 주갑지록(遊戱翰墨 周甲止錄:즐겁게 묵하고 노는 60년)과 그가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문장이라던 ‘인이불여조 하일거투림(人而不如鳥 何日去投林:사름은 새와 같지 않아 언제 내 숲을 찾아갈까)’에서 그의 인생철학이 엿보인다.

글=김정규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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