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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은 지금 '철새들의 천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뚜르룩, 뚜르룩."

아스팔트를 뒤로 하고 농로를 따라 5분쯤 달렸을까. 겨울의 진객(珍客) 흑두루미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들녘을 가른다. 볏짚더미 너머로 네 마리가 나란히 서있다. 가운데 두 마리는 몸집이 작은 어린 것들이다.

흑두루미 한가족이 낟알을 쪼며 노닐고 있다. 2백여m 앞까지 다가서자 고개를 들어 경계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날아 오른다. 암컷과 수컷이 어린 새들을 보호하듯 양 옆으로 날며 일직선을 그린다.

지난 27일 이른 아침 전남 순천시 대대동 간척지. 동쪽 여수반도와 서쪽 고흥반도에 둘러싸인 순천만 바로 앞이다. 천연기념물 228호인 흑두루미를 비롯해 각양각색의 철새들이 갯벌과 농토를 오가며 겨울나기에 들어갔다.

해뜰 무렵 철새들의 날갯짓이 눈부시다. 지구상에 1만1천8백여마리만 산다는 세계적 희귀조류 흑두루미는 시베리아 아한대지역에서 살다가 10월 말께 한국·일본 등으로 찾아든다.

대규모 흑두루미 무리를 볼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는 순천만 뿐이다. 순천만에서 1996년부터 월동하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올해에도 1백20여마리가 찾아 들었다.

흑두루미는 소수의 가족 구성원끼리 먹이를 먹거나 휴식을 취하고, 정찰대를 앞세워 30∼40마리가 무리지어 옮겨 다니기도 한다.

몸집이 하얀 혹부리오리도 만날 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수백마리가 머리 위로 날아가며 군무를 펼치고 있다. 민물도요·붉은부리 갈매기·청둥오리도 저마다 독특한 소리를 내며 손짓하는 것 같다.

요즘 순천만에 와있는 철새는 60여종 1만여마리. 희귀 조류만도 흑두루미·검은머리갈매기·황새·저어새·노란부리백로 등 11종에 이른다. 연중 전체적으로는 1백50여종 5만여마리가 월동하거나 서식한다.

순천만은 순천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이사천이 만나 바다로 유입되는 곳이다. 순천시 도사동·해룡면·별량면 일원으로 갈대밭 15만평과 갯벌 70만평이 펼쳐져 있다. 방조제 위쪽으로 간척지는 1백60만평에 달한다.

드넓은 갈대밭과 농경지를 끼고 있는 갯벌에서는 갯지렁이·게·짱뚱어 등이 살아 숨쉰다. 곡식 알곡과 갯벌 생물 등 먹이가 풍부해 전세계 습지 중에서도 희귀종 조류가 많이 모이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새들은 낮에는 농경지를 사람들에게 내주고 바다쪽 갯벌 끝자락에 모여든다. 모터보트를 세내 바다로 나가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

순천만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과 갈대밭을 배경으로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날갯짓이 환상적이다. 석양을 가르는 철새들의 울음소리는 갈대밭을 끼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거룻배의 통통소리마저 평화롭게 들리도록 한다.

낙조의 절경은 동쪽 해룡면 상내리 와온마을에서 감상하는 게 일품이다. 갈대꽃과 갯벌이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병풍처럼 둘러선 산봉우리로 해가 넘어갈 때까지 또 한차례 새들의 부산스런 움직임이 이어진다.

주민 서관석(50)씨는 "백로·오리 중에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순천만에서 사철을 보내 텃새가 되는 경우도 있다"며 "새들을 살피며 살다보니 사람들 마음도 포근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대마을 선창 위쪽으로 지난 1월부터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조성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내년 말까지 조류관찰장, 생태교실, 염분을 먹고 자라는 염생식물 관찰장, 갯벌 체험지구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순천만 생태환경 안내자로 자원 봉사하고 있는 김인철(30)씨는 "살아있는 갯벌을 지키기 위해 주민과 환경단체·지방자치단체가 힘을 합치고 있다"고 말했다.

순천만의 관문 대대포구에서 승용차를 내리면 광활한 갈대 군락과 뻘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갈대밭은 방조제를 따라 10리길이나 이어진다.

뻘밭에 붉은빛을 띠며 자라난 칠면초도 이채롭다.

밀물이 들어 방조제까지 차오르면 갈대들이 물위에서 춤을 추고 물이 빠지면 갯벌 위로 푸른 실개울이 드러난다.

어머니와 함께 겨울여행에 나선 정나리(25·서울 서초구)씨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철새들이 날아오르는 갈대밭의 일렁거림조차 겨울 들녘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호남고속도로 서순천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순천시내에서 벌교쪽 국도를 달리다 순천 청암대 앞에서 좌회전, 지방도로를 타고 20분 정도 내려가면 순천만 입구가 나온다.

순천=천창환 기자

chuncw@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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