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캐나다 밴프·재스퍼 공원을 가다]맑디 맑은 자연에서 인공의 때를 씻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5면

태평양을 가로지른 비행기가 캐나다 로키산맥 상공에 접어들자 자연스레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로키는 정상부마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의 바다, 눈(雪)의 바다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캐나다 서부 해안도시 밴쿠버를 거쳐 앨버타주(州) 캘거리까지 11시간에 걸친 비행의 피로가 금세 흥분과 설렘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1.인류의 소중한 유산, 캐나다 로키

초기 유럽 이주민들이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처음 로키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긴 한숨이었을까, 아니면 찬사였을까.

18만㎢에 이르는 캐나다 로키의 첩첩산중은 인간이 정착하기에는 고된 환경이었을 게 틀림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로키 여행의 관문은 밴프 국립공원이다. 캘거리에서 서북쪽으로 1백28㎞ 거리다. 남북으로 서로 잇닿아 있는 밴프·재스퍼 국립공원은 요호·쿠트니 등 캐나다 로키의 다른 두 공원과 함께 1984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밴프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한번에 만끽할 수 있는 곳은 설퍼산(해발 2천2백81m) 정상이다. 차로 접근할 수 있는 곤돌라 터미널(1천5백81m)에서 곤돌라를 타면 정상까지 8분 만에 올라간다.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오르면 두시간 길이다. 곤돌라 상행선은 유료(약 1만6천원)지만 하행선은 무료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이곳에 서는 순간, 평생토록 보아온 산보다 더 많은 산을 본다"는 게 현지인들의 자랑이다. 한국인에게는 '글쎄…'지만.

밴프 공원의 탄생은 공교롭게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에서 비롯됐다.

캐나다 동서 횡단 철도가 놓이기 시작해 철도가 이곳 밴프까지 다다른 것은 1883년.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기 2년 전이었다. 철도 인부 3명이 밴프 지역의 한 산기슭에서 유황 온천을 발견했다. 연간 7∼8개월은 눈이 온다는 캐나다 로키에서 뜨거운 온천은 분명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거위'였다. 이들이 건물을 짓고 소유권을 주장하자 여러 사람 사이에 "내가 먼저 발견했다"며 소유권 분쟁이 불거졌다.

캐나다 정부는 소중한 자연 유산이 일부 개인의 소유일 수 없다고 판단, 1887년에 온천 일대를 포함해 광범위한 지역을 캐나다의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2.푸른 하늘, 그보다 더 푸른 호수

설퍼산을 지나 산맥을 따라 북상하다 보면 '로키산맥의 보석'이라는 루이스 호수를 만난다. 호수 뒤편 빅토리아 빙하의 하얀 얼음과 녹청색 호숫물이 대조를 이뤄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곧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라는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해발 1천m가 넘는 지역에 만들어진 산악 도로다. 길이 2백30㎞의 이 도로 양편에는 폭포·호수·설산이 즐비하다.

그중 빠뜨려선 안될 것이 보우봉(2천1백15m)에서 바라보는 피토 호수다. 보우봉에 차를 세우고 1백m 정도 걸어 전망대에 다가섰을 때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확 트인 파란 하늘, 하얀 구름과 산 봉우리마다 쌓인 흰 눈이 눈부시다. 진초록의 침엽수림 속에 하늘보다 파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메랄드빛이란 저런 물빛을 두고 하는 얘기였던가 보다. 몸도 마음도 원색으로 물드는 듯하다.

산악 도로를 따라 재스퍼 공원으로 접어들면 광활한 얼음 벌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최고 두께가 3백80m에 이른다는 컬럼비아 빙원(氷原)에서 흘러나온 애서배스카 빙하다.

빙원은 겨울에 내린 눈이 오랜 세월 쌓여 압축돼 만들어진 얼음 덩어리다. 컬럼비아 빙원은 그 넓이가 3백25㎢에 달하며 빙원에서 흘러내린 얼음 덩어리들이 애서배스카 빙하 등 이 일대 8개의 빙하를 만들어냈다. 매년 4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는 특수 제작된 버스가 애서배스카 빙하 안으로 관광객을 실어나른다.

#3.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곳

수억년 전 시작된 지각 변동으로 바다 속에 있던 땅이 현재의 로키산맥 자리로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 덩어리가 흘러내리며 흙을 깎아 지금의 골짜기와 산·호수를 만들었다.

밴프·재스퍼 공원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들은 로키산맥의 형성과 이 일대의 지질학적 특성, 그리고 생태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소중히 보호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겨날 수 없는 법 아닌가.

1만4천여명의 주민이 사는 밴프·재스퍼 국립공원은 야생 동물의 천국이다. 인구 9천명의 밴프 국립공원에는 이와 비슷한 숫자의 엘크·무스, 큰뿔양·산염소·곰 등 덩치 큰 야생 포유류가 산다. 도로 주변에서는 엘크 수컷들이 머리를 맞대고 싸우는 모습과 서로를 보듬고 있는 어미와 새끼 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간 8백만명의 여행자가 찾아오는 이들 공원은 각별한 노력 없이는 보존될 수 없다. 공원 곳곳의 철제 쓰레기통은 비스듬히 세워서 상단의 뚜껑이 저절로 닫히도록 설치했다. 손잡이 내부 깊숙이 감춰진 레버를 눌러야만 뚜껑이 열린다. 인간의 냄새를 최대한 줄이고 동물이 쓰레기통을 뒤져 식량을 구하는 바람에 야생성을 잃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야생 동물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그들을 존중해 달라…. 야생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공원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에선 생태 관광의 기조를 유지·확대하려는 공원 측의 열성을 엿볼 수 있다.

한적하기만 한 산악도로는 이제 재스퍼 국립공원 내의 시가지를 앞두고 있다. 줄곧 제한 속력(시속 90㎞)으로 띄엄띄엄 달리던 차들이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20여마리의 큰뿔양이 떼를 지어 도로를 건너느라 길을 막아선 때문이다. 양떼는 사람을 개의치 않는 듯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자동차라도 양보다 빠를 수 없다. 양들은 로키의 햇살이 눈부신 듯 붉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밴프·재스퍼(캐나다)=성시윤 기자

copip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