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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0>104話 두더지 人生...발굴40년: 25 되찾은 금구슬 1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술자리였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운명을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발굴작업 도중에 유물을 한 점이라도 도둑맞거나 잃어버린다면 어떤 변명도 소용없는 일이고, 평생 발굴은, 그러니까 고고학은 그 길로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일이다. 때문에 당시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아저씨뻘 되는 작업인부를 불러놓고 수사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누가 제의했는지 술자리는 화투판으로 이어졌다. 나는 원래 화투하고는 인연이 없어 그때그때 배워가며 치는 처지였기 때문에 항상 봉이었다. 당연히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나를 포함한 조사원들은 짜고 치는 것처럼 결과가 좋았고 돈을 많이 잃게 된 인부는 서서히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호주머니 속 비상금까지 꺼내는 것 같았다. 그때 뭔가 종이로 꼬깃꼬깃 싼 작은 뭉치가 바지 호주머니에서 떨어졌다. 화가 난 인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화투장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화투놀이가 끝났고 인부가 잃은 돈은 모두 돌려주었다. 결국 작전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리를 파하고 나서 문제의 종이 뭉치를 펼쳐보니 금구슬이 나오는 게 아닌가. 정말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 인부를 금구슬을 훔친 범인으로 지목한 추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우리는 금구슬을 되찾은 것에 만족하고 그 일을 일절 함구하기로 했다. 아마 문제의 인부는 한평생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사소한 일 같지만 발굴현장에서는 비슷한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상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조사과정에서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면 견물생심, 조사원들이 완전히 파악하기 전에 인부가 한두 개 슬쩍해도 실은 알 길이 없다. 사실 고분 40여기를 조사한 안계리 현장에 상주 조사원은 나를 포함해 4명뿐이었으니 도난을 사실상 방치한 측면도 있다.

땅과 씨름하는 고고학의 어려움을 주변의 문외한 친구들이 알 턱이 없다. 가끔 어떤 친구들은 '평생을 매장문화재 발굴에 종사해 왔으니 그동안 집에 가져다 둔 진귀한 물건들이 많지 않으냐. 그러니 하나쯤 선물로 주지 않겠느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한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른다.

유물이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려면 정식 발굴이 돼야 한다. 고고학적 발굴과 분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유물은 역사를 상실한 생명력 없는 골동품일 뿐이다. 때문에 발굴은 유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만약 고고학자가 이를 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한낱 '도둑'에 그치기 십상이다. 출토 유물이 한점이라도 없어진다면 역사적으로도 죄인이 된다. 고고학자에게 철저한 역사의식, 책임감이 절실한 이유다.

안계리 고분 발굴조사는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서 5∼6세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을 처음 확인했다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서둘러 조사를 마치게 돼 결과적으로 졸속 발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점이 마음에 걸린다. 언젠가 댐이 없어져 다시 안계리 유적을 만나게 된다면 후학의 손에 의해 더 완벽한 조사가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안계리 고분군 발굴은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 남겼다. 발굴 기간 중 학예사 시험 일자를 늦게 알게 돼 허겁지겁 시험 당일 서울에 도착해 응시했다. 한발 늦어 시험을 못봤더라면 오늘날 이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인부반장은 조사 말기 시간이 없다며 서둘러 작업하다 삽날로 자기 발등을 찍기도 했다.

잊지 못할 얼굴들도 있다. 취재하러 왔다가 열악한 작업 환경의 어려움을 목격한 당시 경주 주재 한국일보 우병익(禹炳益) 기자는 인근 군부대에 부탁, 야전 침대 등을 지원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또 경주의 향토사학자였던 고 최남주(崔南柱)옹이 육십이 훨씬 넘은 노구를 이끌고 젊은 후학들을 지도·격려하기 위해 현장을 자주 찾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정리=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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