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4시간 기본기만 훈련 … ‘제2 차붐’ 손흥민 뒤엔 고집불통 아빠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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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SV의 손흥민. 그의 아버지 손웅정 춘천 FC 감독은 결과보다 기본기라는 축구철학을 고집한 끝에 오늘의 손흥민을 만들었다. 사진은 5일(한국시간) 첼시와의 프리시즌 경기에서 드리블하는 손흥민. 그는 이 경기에서 결승골(함부르크 2-1 승리)을 터뜨렸다. [함부르크 AP=연합뉴스]

“기본기 없으면 축구 선수 못 한다. 달리기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아?”

9일 오후 강원도 춘천 공지천 잔디구장에 손웅정(44) 춘천 FC 감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섭씨 32도의 무더위 속에서 10대 초반 아이들은 볼 트래핑 기술을 익히는 데 푹 빠져 있었다.

이상한 건 두 팀으로 나눠 경기를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기본기를 완벽하게 소화하기 전까지는 승패를 걸고 경기를 하면 안 된다”는 손 감독의 확고한 축구철학 때문이다. 지난 3일 한국을 찾은 수비사레타 FC바르셀로나 기술위원장이 “14세까지는 경기를 이해하고, 기본기를 갈고 닦는 단계다. 이때 경기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고집 하나로 춘천 FC를 이끌어 왔다. 많은 선수가 기본기 위주의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 축구부로 떠났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최근 프리시즌 첼시와의 경기에서 역전 결승골을 넣으며 독일 분데스리가 스타로 떠오른 손 감독의 아들 손흥민(18·함부르크)이다.

볼 리프팅 시범을 보이는 손웅정 감독.

손 감독은 프로축구 현대와 일화를 거친 공격수로 29세 때 큰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는 20여 년 선수로 뛰면서 기본기 없이 스피드와 패기만으로 축구를 했다는 게 창피했다. 또 학교 축구부의 엘리트 시스템 속에서 승패에 집착했던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그는 축구에 소질을 보인 아들을 학교 축구팀으로 보내지 않고, 8살 때부터 매일 4시간씩 직접 훈련을 시켰다. 공을 내 맘대로 다룰 수 있을 때까지 패스와 슈팅 훈련은 전혀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을 학교 축구부에 보내지 않고 붙잡아 두는 손 감독에게 “미쳤다”며 손가락질했다.

손 감독은 2007년 아들의 실력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오르자 바깥세상으로 내보냈다. 육민관중-동북고에서 7개월 동안 선수 생활을 하며 주목 받았고 곧바로 16세 이하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 2008년에는 대한축구협회의 도움을 받아 연습생 신분으로 독일에 진출하는 행운도 안았다. 2009년 함부르크 유스팀과 1년 계약을 했고, 현재는 1군에서 분데스리가 데뷔를 기다리고 있다.

아르민 페 함부르크 감독은 지난 2월 유스팀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을 보고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고 공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선수다. 당장 1군에 합류시켜라”고 지시했다. 독일의 ‘축구황제’ 베켄바워도 최근 손흥민을 “제2의 차붐으로 성장할 재목”이라고 극찬했다.

손 감독은 2005년 춘천 지역 아이들을 모아 유소년팀 춘천 FC를 만들었다. ‘기본기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게 이 팀의 모토였다. 손 감독은 “당장 성적을 내야 하는 학교 축구부는 승패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에서 벗어난 유소년팀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손 감독은 선수들을 6개월씩 학교 축구부로 보내 그곳 분위기를 맛보게 했다. 지난해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훈련한 이승원(13)군은 “빨리 춘천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경기 결과에 스트레스를 받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뛰는 게 너무 싫었다”고 말했다. 엘리트 축구팀에 갔던 선수들은 모두 그에게 돌아왔다.

선수들이 손 감독을 따르는 이유는 말보다 몸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트래핑부터 패스까지 모든 걸 함께 한다. 손 감독은 이렇게 손흥민을 키워냈고, 제2의 손흥민을 키우고 있다.

춘천=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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