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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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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너는 방물장수의 함지에 담겨 우리 집 앞에 버려져 있는 것을 너희 아버지가 거둬들였지.”

어느 날 멀쩡하게 잘 노는 어린 손자나 조카들을 불러 앉히고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그렇게 허두를 꺼내면 아이들을 물론 어림없다는 듯 도리질을 하며 아니라고 소리친다. 예부터 그런 경우에 해오던 그 다음 순서로 들어가서도 한동안은 마찬가지다. 여전히 정색을 하고 생판 거짓으로 꾸며댄 근거를 들이대며 그 아이가 버려진 정황을 꾸며대 봐도 아이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부모의 애절한 정을 꾸며대고 달콤한 물욕으로 유혹하면 완강하게 버티던 아이도 끝내는 넘어가고 만다.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너를 다리 밑에 버리고 떠날 때 얼마나 슬펐던지, 네 친엄마·아빠가 발 내디디는 자국자국 피눈물이 고였다더라.”

“지금도 온 천지 방방곡곡 너를 찾아다니는데, 하도 많이 울어 두 눈이 다 짓물렀다더라.”

“너를 버린 뒤에 네 친엄마·아빠는 과자공장을 차렸는데, 입에만 넣으면 그대로 녹는 온갖 맛난 과자를 산처럼 쌓아놓고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더라.”

“돈도 엄청나게 많이 벌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며, 네가 오면 주려고 장난감도 자동차, 비행기 없는 것 없이 한 방 가득 사모아 두었다더라.”

이야기가 그쯤으로 이어지면 드디어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저항을 포기하고 심할 때는 스스로 보따리를 싸 떠날 채비까지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참지 못한 어른들의 폭소와 그제야 속은 것을 알게 된 아이의 성난 홰 울음으로 그 짓궂은 장난은 끝이 난다.

내가 그 장난의 대상이 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만 해도 또래들에게서 그런 놀림을 당한 얘기를 흔히 들을 수 있었고, 때로는 그 광경을 직접 본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이미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 일반의 삶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란에 뿌리 뽑힌 삶, 갑작스러운 월남으로 시작된 이산(離散)과 유랑의 연장으로만 살아가고 있던 아버지가 가장인 우리 집에서는 달랐다. 어쩌다 떼밀려 하게 된 월남을 오히려 고향땅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여기고, 일생을 유기된 영아의 심리로 산 아버지 때문에 토박이 부산 사람인 어머니와 외가 쪽 어른들까지도 내게 그런 장난을 할 여유를 되찾을 수 없었다. 그보다는 아버지가 술만 취하면 흥얼거리던 ‘타향살이’나 ‘굳세어라 금순아’의 처량한 가락 속에서 어린 나까지도 ‘눈보라 휘날리는’ 흥남 부두가 버림받은 고향처럼 느껴지고, 안태 고향인 부산에서의 삶은 언젠가는 버리고 떠나야 할 ‘타향살이’로 의식 속에서 엇바뀌기까지 했다.

그 뒤 자라면서 알게 된 아버지의 월남 경위도 내가 유기된 듯한 느낌 또는 이향(離鄕) 심리를 키워나갔다. 흥남 인근의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1950년 유엔군의 북진 때 국군의 군수품을 지고 장진호 부근까지 갔다 온 일로 북한에 머무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국군의 총칼에 끌려간 것이라 돌아오는 인민군들에게 사정을 해보자는 형제들의 권유가 있었으나, 국군의 군수품을 지고 장진호로 가는 도중에 본 인민군의 끔찍한 부역자 처형 흔적은 아버지에게 월남을 선택하게 했다. 흥남 철수의 아침 아버지는 두 아이와 만삭의 아내까지 버리고 미군 유조선 메러디스 빅토리호(號) 갑판에 홀몸으로 끼어 앉아 남으로 내려왔다.

처음 거제도에 부려진 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당신의 또 다른 십팔번의 한 구절대로 ‘국제시장 나그네’가 되었다. 그리고 악착스레 국제시장 바닥을 긴 지 5년 만에 작은 점포 하나를 얻고 새 장가를 들어 나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북한에 두고 온 아이들은 가슴 깊이 살아남아 철이 든 내게 끊임없이 기억에도 없는 먼 고향을 느끼게 했다. 어떤 때 아버지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어김없이 아버지가 나를 통해 북쪽 어느 하늘 아랜가 남은 내 이복형들을 보고 있음을 진작부터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나 또한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어딘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먼 하늘 아래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 아버지가 남쪽에서 새로 얻은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를 남겨두고 세상을 버린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한 내가 군에서 제대한 해였다. 재수까지 하고도 대학입시 전기시험에 다시 실패한 나는 후기에서 당시 경쟁만 치열하고 실속은 없는 어떤 대학 연극영화과로 지망을 바꾸었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입대하여 제대한 뒤로는 부산으로 내려가 어떤 작은 극단에서 보수도 없는 조연출을 하면서 나름으로 연출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국제시장에서도 알려진 이북 사람의 근성으로 벌어 우리 삼남매에게 남긴 것은 그리 대단한 재산은 못 되었으나, 장남인 내가 직장다운 직장 없이 빈둥거리면서 연극에 열을 올리고 지내도 견딜 만은 했다. 나는 가끔씩은 내 삶이 그렇게 낙착을 본 게 조금은 엉뚱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별 불만 없이 연출 수업에 열중하면서 몇 년을 더 보냈다. 그러다가 연출 지도를 하는 선배가 ‘리투아니아 남자들’이란 연극을 기획하면서 뜻밖에도 내 금발의 제니와 8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남자들’이란 연극은 원래 극본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동구 작가가 쓴 같은 제목의 단편을 그 선배가 직접 각색한 것인데, 숱한 좋은 각본들 제쳐놓고 직접 각색해가면서까지 그 작품을 굳이 무대에 올리고 싶어 한 까닭은 솔직히 그때도 잘 알 수가 없었다.

하도 오래전 것이라 연극의 줄거리조차 희미하지만 기억으로는 대강 이랬다. 전쟁에 참가했다가 운 좋게 약간의 전리품까지 챙기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리투아니아 청년이 있었다. 그가 부모형제에게 자신의 성공을 극적으로 자랑하기 위해 어느 때까지는 신분을 속이고 얼굴을 감추려 한 게 비극의 발단이 되었다. 그 청년이 어두운 곳에서 얼굴을 감추고 자는 동안에 그가 지고 온 배낭과 자루를 훔쳐보고 그 안에 든 재물에 눈이 뒤집힌 가족들은 그를 죽이고 그 재물을 뺏을 궁리를 했다. 그리하여 남자들이 힘을 합쳐 잠든 그 청년을 죽여놓고 보니 그게 바로 자기의 자식이고 형제란 것이 드러나 비극적인 대단원을 맞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음악을 맡은 스태프가 그만둬 다시 뽑는 과정에서 제니를 만나게 되었다. 몇 군데 알 만한 곳에 수소문도 하고 극단 사무실 앞에 작은 구인광고도 내걸어 사람을 찾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중앙난방 장치가 안 된 허술한 극단 사무실에서 작은 석유난로를 끼고 각본 검토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층계를 걸어 올라오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맑고 높은 여자애들 같았는데 함께 연극하는 단원은 아니었다.

“가시나야. 거 좀 섰거라 보자. 같이 안 들어갈래?”

“저 가스나가 오늘따라 와 이리 꾸무럭거리노? 니 어디 체했나?”

그렇게 거침없는 사투리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문 앞까지 와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문을 열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검토하고 있던 극본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무심코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주고받는 말투로 봐서는 같은 또래의 부산 아가씨 둘이 들어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둘 중 앞선 사람은 뜻밖에도 황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백인 아가씨였다. 뒤따라 들어오는 것은 가무잡잡한 이십 대 초반의 한국 아가씨였는데, 오히려 수줍어하며 뒤로 빠지는 것은 그 아가씨 쪽이었다. 내 물음에 대답한 것도 그 백인 아가씨였다.

“여기 음악 스태프 필요하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까 해서요.”

어휘는 표준말로 바뀌었지만 억양은 바로 조금 전에 들은 두 목소리 중 하나인 그 사투리였다. 그제야 조금 마음을 가라앉힌 내가 사무적이 되려고 애쓰며 다시 물었다.

“함께 오신 분도 같이 지원하시는 겁니까?”

“쟤는 아니에요. 그냥 구경 삼아 절 따라 왔어요.”

그 말에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그녀를 살펴보며 물었다.

“이력서 가지고 오셨습니까? 전에 어디서 이런 일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여기 이력서 준비해 왔어요. 한국에서는 해본 적 없지만, 미국에서 학교 연극에 음악을 담당해 본 적은 있어요.”

그러면서 한글로 단정히 이력서라고 쓰인 흰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그 백인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까닭 모를 낯익음이 갑작스럽고도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에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어보게 했다. 이력서를 펼쳐들자마자 나는 아, 하고 외치고 싶을 만큼 놀랐다. 사진 곁에 있는 김혜련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헬렌, 나의 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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