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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27. 군납업자 친목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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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건설군납조합 이사 시절의 필자(右). 왼쪽부터 건설군납조합 김성엽 이사, 현창삼 이사, 한사람 건너 주한미군 사령관, 미8군 계약관 해리 김.

1963년 말 서울시경에서 강 사장과 나를 불렀다.

"친목회에서 물러나줘야겠소." "왜요?" "이유는 묻지 마시오. 윗선의 일이라 우리도 어쩔 수 없소."

'윗선'이라면 당시 실세들, 즉 5.16으로 집권한 육사 8기 세력일 터였다. 우리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일어나야 했다. 곧바로 군납업자 친목회는 해체되고 군납진흥회라는 명칭을 달고 새로운 인물들이 접수했다. 회장은 바로 육사 8기생인 김모씨였다.

달러 한 푼이 아쉽던 시절이라 주한미군은 한국경제에 아주 고마운 존재였다. 연간 1억달러 가까운 돈을 한국에 뿌렸던 것이다. '외화벌이'로는 이보다 더한 효자가 없었다. 특히 건설 부문에 할당된 금액이 적지 않았다. 장병 막사나 식당.연료탱크.무기고 등을 한국기업들이 지었던 것이다.

이를 겨냥해 활동하던 건설 군납업자가 220명정도 됐다. 미국은 장비와 자재를 후하게 쓰기 때문에 공사를 따기만 하면 이윤이 크게 남았다. 자연히 경쟁이 아주 치열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입찰가를 낮게 써내는 바람에 이윤 폭이 점점 줄었다.

군납업자 친목회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입찰가가 낮으면 결국 달러를 그만큼 못 벌어들인다는 얘기다. 이건 매국적인 행위다'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을 놓고 누가 자발적으로 양보하겠는가. 그래서 친목회라는 단체가 필요했다.

4.19 이후 명동 시절을 청산하고 건설회사를 차린 강 사장은 친목회를 조직한 다음 나를 업무부장으로 불러들였다. 업자들을 달래서 담합을 유도하는 게 내 임무였다. 입찰 공고가 붙으면 '떡을 쳐서' 한 회사에 밀어준 다음 다른 몇 개 회사는 들러리로 세웠다. '떡을 친다'는 것은 건설업자들 사이에 쓰이던 은어로, 공사 입찰을 앞두고 담합을 한다는 말이었다. 낙찰받은 회사는 '떡값'으로 입찰금액의 10%를 탈락한 회사들에 나눠주었다. 입찰금액의 또 10%를 회비 명목으로 거둬 그 중 일부를 중앙정보부에 상납했다.

간혹 담합 약속을 깨고 더 낮은 가격을 써내는 회사가 있으면 입찰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도 내 일이었다. 나는 되도록 공평하게 낙찰 기회가 돌아가도록 애썼다. 종종 뒷돈을 주면서 나를 매수하려는 업자도 있었지만 일절 응하지 않았다. 자랑 같지만 그런 소문 덕분에 내 평판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나중에 건설사를 차려 독립했을 때 주변에서 여러 사람이 도움을 준 것도 이런 행적 덕이 아니었나 싶다.

친목회를 해체하고 1년이 지난 64년 12월 중순 미 8군 CID 요원들이 군납진흥회 모임을 급습했다. CID는 주한미군 지원 사업을 감찰하는 곳이었다. 담합 행위는 당연히 엄벌 감이었다. 카메라로 현장을 찍으려는 CID 요원들을 몸싸움 끝에 밀어낸 뒤 김모 회장은 강 사장을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강 사장이 친목회를 뺏긴 데 앙심을 품고 미 8군에 밀고 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는 고자질한 적이 없었다.

총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김모 회장은 결국 재판 과정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당시 육사 8기의 권세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 대신 실행에 나섰던 두 사람은 징역 8~10년씩을 받았다. 이 중 한 사람은 군납진흥회의 총무부장이었다. 몸통은 두고 깃털만 잡아들이면서 희대의 '청부 살해극'은 막을 내렸던 것이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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