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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란 표현 대신에 USA나 아메리카로 불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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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만약 '갑돌'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고우쓰쿠(こうつく)'라고 읽으면 기분이 어떨까? 또 '서울'을 중국 사람들이 제멋대로 '한청(漢城)'으로 일컬을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화를 벌컥 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남의 나라 이름을 함부로 쓰고 있다.

나라마다 제 나라를 일컫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이유로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미국'으로, England를 '영국'으로, 그리고 France를 '불란서'로 표기하고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우리 이름을 '자기식 표현'이라는 미명 아래 제멋대로 부른다면 어떨까?

이런 명칭은 중국인과 일본인이 서양의 국명을 자기네 발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조합한 말이었다. 그 결과 중국에서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는 美(米)利堅共和國으로 일컬었고 이를 줄여 美國 또는 米國이라고 했다. 일본의 경우는 アメリカ나 米國으로 표기한다. 이럴 경우 중국말이나 일본말로는 '아메리카' 공화국(합중국)이라고 발음된다. 물론 우리의 발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게다가 USA를 중국.일본에서는 '米國'으로 표기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美國'으로 표기한다. 같은 아시아 국가이며 같은 문화권인데 왜 우리나라만 '아름다울 미'자로 표기할까? 그냥 USA나 '아메리카'라고 부르면 안 될까? 게다가 중국.일본이 자기네 식으로 발음하기 위해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스페인을 '서반아(西班牙)', 인디아를 '인도(印度)', 인도네시아를 '인니(印泥)'로 일컫고 있다.

우리가 말레이시아를 '말련'이라 하는데 이것 또한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말레이시아의 '말'과 연방의 '연'이 합쳐져서 '말련'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어로는 마련(馬聯)이라고 한다. 게다가 오스트레일리아를 '호주(濠洲)'라고 하는데 이건 더욱 어리둥절하다.

개화기에 들어온 서양 국가들의 중국식.일본식 명칭이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사용해 왔기에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라의 이름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에 따라서 그 나라가 우리의 의식에 새겨지기 때문에 이를 제멋대로 불러서는 안 된다.

이것도 모자라서 일부 사람은 서울을 일컫는 말도 한자식으로 쓰고 있다. 물론 중국인은 서울을 '한성(漢城:한청으로 발음)'이라 하고, 일본인은 '경성(京城)'이라 하며 '서울'이라는 낱말에 대해 거리감을 갖는다. 그러나 중국은 워싱턴(華盛頓: 훠-셩툰), 런던(倫敦:룬둔), 파리(巴黎:빠리), 로마(羅馬:루-마) 등 서양 지명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발음에 충실한 한자를 만들어 내는 성의를 보이면서도 유독 서울은 漢城(한성)으로 표기함으로써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다.

뜻으로서, 한자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약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발음기호로서 한자는 더 이상 가치가 없다. 한자 병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뜻으로서의 한자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제 한자는 뜻으로서 의미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한자를 병용하자는 사람은 중국 문화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이에 비해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 그래서 한자라는 말만 들어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자 병용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중화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그런 것이 많기 때문에 어찌 보면 둘 다 중화주의의 피해자이다. 사대주의가 이렇게 우리 말글 생활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영국.독일을 '잉글랜드.도이칠란트'로 표기하는 것이 신사대주의가 아니며, 한성을 '서울'로 쓰는 것이 국수주의가 아님을 명확히 인식할 때다. 문제의 뿌리는 제 나라 이름, 제 도시를 본디 이름으로 일컫는 것이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을 쓰자고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한자식 이름을 고집해선 안 되며 잉글랜드를 굳이 'England'로 표기할 필요도 없다. 한자 병용의 중국 사대주의와 영어 공용의 서구 신사대주의에서 벗어나 국제화 시대에 두루 쓰이며 우리 말법에 맞는 표기를 해야 한다. 한사코 이를 고집할 경우 우리 말글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며 이로써 우리 문화는 썩어갈 따름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말을 입 밖으로 내면서 머뭇거리거나 더듬거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손의식 용인송담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