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두가지 전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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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번갈아 주목해왔다. 그러나 13일 부시 대통령은 이 두 인물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했다. 백악관은 아랍어 위성방송 알 자지라 TV가 전날 빈 라덴의 메시지라며 방영한 녹음테이프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혔으며,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수용하겠다는 후세인 대통령의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라크의 결의 수용은 사찰단이 바그다드에 들어가 후세인의 협조 의사를 확인할 때까지 만큼은 미국의 대(對)이라크전이 늦춰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라크전의 목표가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저지하는 데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는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그러나 백악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라크가 결의를 수용했다지만 그건 무기사찰이 더 신중해야 하며 사찰단의 임무가 매우 엄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정도라는 태도다. 이라크가 사찰이 수월하게 끝나게 놔둘 리 없다는 판단을 깔고 있는 것이다.

유엔에 전달된 이라크 정부의 서한은 "이라크는 어떤 종류의 대량살상무기도 개발하지 않고 있다. 사악한 이들(Evil people)의 거짓 주장과 달리 이라크는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백악관은 "반박할 만한 증거가 충분히 있지만 앞으로 토론하면 된다"고만 언급하며 논쟁을 미루는 현명함을 보였다.

한편 지난 12일 공개된 빈 라덴 육성 테이프는 우리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테이프 주인공의 목소리는 널리 알려져 있는 빈 라덴의 음성과 거의 일치하며, 무엇보다 테이프를 가득 채운 음모와 위협으로 미뤄 전문가들은 목소리가 빈 라덴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몇 달 전 미국의 고위 관료들은 빈 라덴이 이미 죽었을 것이란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는 잊혀질 만하면 악몽처럼 다시 나타났다. 물론 알 카에다 잔당을 고무하려고 누군가 그의 음성을 짜깁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테이프의 진위 여부를 떠나 누군가 우리를 겁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이런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슬람 급진세력과의 전투는 끝없는 싸움이며 어쩌면 이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지난 두달간 알 카에다와 그 지지자들의 활동은 상당히 커졌다. 빈 라덴 테이프의 공개는 이런 흐름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이벤트다. 이는 예멘의 프랑스 해군함정 테러(10월 6일), 쿠웨이트의 미군 피격(8일), 인도네시아 발리의 폭탄 테러(12일), 체첸 반군의 모스크바 인질극(23일)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으로 발생한 사건들과도 맥을 같이 한다. 알 카에다와 관련된 웹사이트에 실린 선동적인 글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빈 라덴이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수행에 관여했다는 부분을 믿기 어렵긴 하지만 그가 인질극을 하도록 자극했을 가능성은 있다.

체첸 문제를 동티모르와 이라크 등 다른 급진 이슬람 단체 활동과 연결시키는 것은 '현대의 역사는 반 이슬람으로 점철돼 있다'고 믿게 만들려는 빈 라덴의 책략이다. 서구세계는 알 카에다와 이라크의 위협을 저지하고, 빈 라덴이 이슬람 세계라는 비옥한 토양에 악의 선전술을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정리=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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