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콩>한랭기류 감도는'韓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얼핏 보면 홍콩 내 한류(韓流·한국 열기)는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호텔 리어''겨울연가''이브의 모든 것'에 이어 '아름다운 날들''의가형제''엄마야 누나야' 등 한국 드라마들이 꼬리를 물고 홍콩인들의 안방을 찾고 있다.

홍콩 내 최고 금싸라기 땅이라는 코스웨이베이의 타임스퀘어(時代廣場). 한 평당 월 임대료가 20만 홍콩달러(약 3천만원)가 넘는 곳이다. 이곳에 지난 7일부터 60평 규모의 한국관이 들어섰다. KOTRA 홍콩지사가 마련한 '코리아 위크'의 행사 현장이다. 홍콩 내 한류를 철석같이 믿고 벌인 야심찬 기획이다. 행사장은 한국과 한국상품을 하나라도 더 알리려는 한국 기업들의 발걸음으로 잔뜩 부산하다.

'월드컵 4강'은 홍콩 내 한국의 위상을 한차원 끌어올렸다. '한국'하면 무조건 좋게 봐주는 분위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얼마 전 동네 세탁소에 들른 한국 주부 崔모(42)씨는 주인으로부터 "이 양복 어디서 짜깁기했나. 혹시 한국 아닌가. 홍콩에서 이처럼 정교하게 수선하기 힘든데…"라는 말을 듣고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진 경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겉모습에 불과하다. 한꺼풀 안을 들여다 보자.

올해 '엽기적인 그녀'가 홍콩에서 한국 영화 중 최고의 흥행 성적을 낸 뒤 '달마야 놀자'등은 맥도 못추고 물러갔다. 한국 대중음악 역시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

'달마야 놀자'를 개봉했던 고삼영화의 장주성(張柱成)사장은 "홍콩 업체를 거치지 않고 영화를 직수입했더니 포스터 부착부터 영화관 배정까지 이런저런 견제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전략 부재'였다는 얘기다. 한류만 믿고 40만달러(약 5억원)를 투자했던 교민들도 큰 손해를 봤다.

현지 정부 차원의 분위기도 싸늘하다. 중국 정부는 '피아노''명랑소녀 성공기'등 한국 드라마에 대해 '너무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란 이유로 수입을 불허했다. 한국 가수들의 공연도 "횟수가 너무 잦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한류 열기를 과신한 방송국들의 '고가(高價)전략'도 한류를 한류(寒流)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예를 보자. 과거엔 20부작 드라마의 해외 판권을 2만달러 안팎에 팔았다. 그러나 지금은 20만달러를 호가한다. 동남아 업체들은 "그런 비싼 값이라면 차라리 일본·대만이나 미국 쪽에서 수입하겠다"며 자연히 등을 돌렸다.

인기 탤런트들의 몸값 올리기도 한몫 했다. KOTRA 측은 '코리아 위크'행사를 위해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김희선씨를 홍콩으로 초청하려 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두 차례의 30분 사인회에 3천만원이란 조건을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류를 받쳐줄 인프라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현재 홍콩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홍콩 시티(城市)대학이 유일하다. 그나마 너무 비싸 일반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오죽하면 한국인이 경영하는 '에이스 워크숍 프로덕션'이란 업체가 "한류를 팔려면 한국어부터 가르쳐야 한다"며 팔을 걷고 나섰을까.

딩왕(丁望) 전 명보 편집장은 "일본 문화가 과거에 어떻게 동남아를 파고 들었는지 생각해보라"고 지적한다. 한국 관련 자료· 노래·문화 등 각종 '한류 인프라'를 잔뜩 깔아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한류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충고로 들렸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yas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