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현대미술관에 가봤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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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가을은 화사하다. 샛노란 택시, 거리 구석구석에 있는 낙서화 그리피티(Graffiti). 팝아트의 앤디 워홀에서 단편영화감독 마틴 스코시즈·짐 자무시·스파이크 리, 그리고 우디 앨런까지. 뉴욕하면 우리는 실험적이고 독특한, 그래서 활발하고 새로운 감수성과 그로 인한 유행과 창작을 기대한다. 뉴욕 타임스에서 '뉴욕 현대미술관 퀸즈' 광고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흔히 영어약자인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로 불린다. '맨해튼 53번가 모마'는 지난 6월 말 맨해튼 동쪽 다리 건너 동네 '퀸즈'로 이사했다. 재건축 중인 '맨해튼 모마'가 2005년 완성될 때까지 임시로 리모델링한 식품제조공장에 자리를 잡았다.

파란색 공장에 흰색 글자가 인상적인 '모마 퀸즈(MoMA QNS)'는 컬러풀한 초대형 컨테이너를 연상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당장이라도 뮤지컬 '렌트(RENT)'며 '스톰프(STOMP)'가 펼쳐질 것 같은 창고 분위기다. 세련되고 '쿨'하게 맨해튼에서 뽐내고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비하면 너무 작은 모마 퀸즈. 미술관 외관 천장에는 '굴뚝'들이 이채롭게도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가방검사를 통과하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연주되고 있다. 미술관에서 고용한 기타리스트의 연주다. '보여짐(To Be Looked At)-회화와 조각의 컬렉션'과 '현대회화: 여덟가지의 제안'이라는 주제로 전시 중. 4천5백여평의 넓은 1층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북적댄다.

피카소·고흐·몬드리안·샤갈·모네 같은 현대미술 거장들의 명품들이 거짓말처럼 그곳에 모여 있었다. 녹아 있는 시계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 달리의 '기억의 고집'은 생각보다 작았고, 샤갈의 몽환적인 '마을과 나'는 컸다. 피카소의 그림은 대체로 대작이었다.

천장이 높은 공장 건물이라 관람객들의 소리가 울린다. 평일 낮인데도 관광객들, 특히 중년 부인들이 삼삼오오 진지한 표정으로 기웃거린다. 거꾸로 된 26인치 텔레비전 수상기 안에선 한 남자가 '생각하라 생각하라(Think Think)'며 계속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

난해한 현대미술을 명료하게 풀어준 '글로 된 그림'도 있었다. '무엇이 그림인가(What Is Painting)'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 따르면 "좋은 작품은 단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잘 연관된 것이며, 예술은 시각 감상을 위한 창작행위"란다.

미로의 조형물 '네덜란드식 인테리어1'을 지나 칸막이된 방에 이른다. 황량함·금속성의 공장지대·소외감 등 퀸즈의 여러 모습을 작가 루돌프는 흑백 사진으로 담아냈다. 유일한 동양 작품은 나라 보시토모라는 일본인의 '내 인생의 시간들''일요일에 사람들은 무언가를 말한다' 따위의 앙증맞은 낙서 수십 점이다.

전시장을 다 둘러봐도 모마가 소장하고 있다는 요절한 천재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한글로 된 안내 팸플릿을 뒤적였다.

다니구치 요시오의 설계로 3년 후 개관할 '맨해튼 모마'의 모습들이 대형 화면과 컴퓨터 모니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전시장을 나와 2층 카페에서 뉴요커를 흉내내며 카푸치노를 마시는데 작품 하나가 머리에 맴돈다. '생각하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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