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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끝에 추억을 찍어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0면

화가 오치균(46)씨는 지난 몇년간 '사북 풍경'을 그려왔다.

강원도 태백산 골짜기에 들어앉은 사북은 한때 이름높던 탄광촌이었으나, 오씨가 그린 사북은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 쇠락해가는 사북의 마지막 모습이다.

6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오치균-사북그림'전은 한 화가가 자신의 영혼을 통해 걸러낸 '사북의 빛'을 보여준다. 검은 도시 사북이 화가 손끝에서 잿빛을 벗고 색깔옷으로 갈아입었다.

붓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두텁게 짓눌러진 그 물감 지층들은 탄가루로 온통 까맣던 마을, 잊혀진 사북을 과거 속에서 불러낸다.

오씨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지두화(指頭畵)는 화가를 화면에 더 밀착시키는 기법이다. 물감들은 손가락을 거쳐 캔버스에 배어들 때, 붓이 개입했을 때보다 훨씬 더 화가의 마음을 촉각적이고 즉각적으로 화면에 드러낸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끈적끈적하게 제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물감 자국들은 물성(物性)뿐 아니라 사북의 역사가 지닌 아픔까지를 품고 있다.

오씨 그림들에서 사람들은 희미한 그림자로 남았다. 사람들이 떠난 빈 집과 찬 바람이 부는 골목과 홀로 솟아난 꽃들만이 처덕처덕 발라진 물감들을 비집고 한때 '사북'이라고 불렸던 곳을 증언한다. 지붕 끝에 나부끼는 빨간 옷자락까지도 처연하다.

손가락이 부대낀 자국들에서 추억을 품은 풍경들이 피어난다. 화가는 탄가루가 잦아든 사북에서 오히려 '파란 삶'을 보았다.

푸른 페인트와 요란한 무늬 커튼이 남은 폐가들에서 사람들의 한숨은 하늘로 오르고 비로소 풍경은 독립했다.

화가는 "그나마 살아 있는, 살아 가는 사북의 모습.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가요? 이 풍경마저 사라진다면 너무 아깝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오씨가 태백을 지나다가 우연히 본 사북의 첫 인상, "세상이 새카맣다고나 할까"라는 탄성과도 같은 깨달음에서 '사북' 연작은 태어났다.

화가는 그를 사로잡은 대상에 정신을 완전히 맡겨버렸다.

그가 예전에 그렸던 이국 풍경들, 적막한 산타페나 눈으로 뒤덮인 뉴욕보다 더 사람들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세상이 여기에 있다. 꿈틀거리는 손자국이 보는 이를 그림 속으로 빨아들인다.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검은 길'과 '검은 숲' 속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살아있음'의 생명력이 강하게 요동치는 듯하다.

"나를 대중 고객들에게 프레젠테이션할 자료가 필요해서" 작가가 마음 써 만든 두툼한 화집 '사북 그림집'에서 평론가 김복기씨는 그 생명력을 이렇게 풀었다.

"지식과 이성을 무장해제하고, 의식 저 밑바닥에 흐르는 동물적인 감각 혹은 근원 충동으로 보고 느끼는 것(아름다움 혹은 진실)에 흠뻑 빠져든 것."

삶의 그늘은 오치균씨에게 와서 생명의 빛이 되었다. 02-736-1020.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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