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중앙일보국제마라톤>지영준 마라톤 새 별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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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인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40.5km 지점. 선두그룹에서 뛰던 한국의 지영준(21·코오롱)이 스퍼트를 시작하자 프레드 키프로프(케냐)가 곧바로 응수했고, 무바라크 후세인(케냐)도 뒤질세라 속도를 높였다.

이후 세 선수는 엎치락 뒤치락 숨가쁜 막판 레이스를 펼쳤다.

골인 장소인 잠실종합운동장 트랙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단거리 경기를 방불케 하는 스피드전이 전개됐다.

결국 최후의 피치에서 앞선 후세인이 맨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고, 키프로프와 지영준이 나란히 1초 간격으로 뒤를 이었다.

두세걸음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던 지영준은 골인 직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

아쉽게 3위에 그쳤지만 지영준은 이날 최고의 레이스를 펼쳤다. 2시간9분48초. 2000년 2월 이봉주(32·삼성전자)가 도쿄 국제마라톤에서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을 세운 이후 2년9개월만에 국내 선수로는 처음으로 10분대 안으로 들어오는 호기록을 작성했다.

지영준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였다.

코오롱 정하준(50)감독도 레이스에 들어가기 전 "등수 안에 들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고요, 그저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달리기만 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마라톤 완주 경험이 한번밖에 없는 데다 부산아시안게임 육상 5천m와 1만m에 출전하느라 대회 준비를 변변히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대를 모았던 선수는 김이용(29)이었다. 그러나 그는 37km 지점부터 피로한 기색을 보인 끝에 40km 지점에서 뒤로 처졌다.

지영준에게는 이번이 두번째 마라톤 풀코스 도전이었다. 그런 그가 세계 톱랭커들과 1초를 다투는 대접전을 펼쳤다는 것은 그의 천부적인 자질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감독은 "영준이는 줄곧 중·장거리 선수로서 트랙에서만 훈련을 해왔다. 레이스 막판에 케냐 선수들에게 뒤처진 것도 어찌 보면 도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라톤 초년병인 그가 두번째 도전에서 10분벽을 깼다는 것은 나도 믿기 힘든 사실이다"며 기뻐했다.

지영준은 "외국 톱클라스 선수들과 함께 레이스를 한 게 도움이 됐다. 출발할 때부터 욕심 안 부리고 이들에게 따라붙기만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여 석성중 3학년 때 육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체력장 때 달리기하는 모습을 본 체육 선생님이 군(郡)대회에 내보낸 게 계기였다. 보통 선수들이 초등학교 시절 선수로 나서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교 진학 후 발군의 기량을 과시하며 한국 중·장거리의 대표 주자로 성장했다.

그는 1999년 정봉수(2001년 사망)감독의 눈에 띄어 코오롱에 입단했다.

정감독은 "고 정봉수 감독님은 영준이를 누구보다 아꼈다. 감독님이 마지막으로 공을 들인 영준이가 이제 싹을 틔운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열심히 지도하겠다"고 말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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