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위해 자유를 포기하라" 국가 권력이 정당화한 폭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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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교수는 지난 8월부터 1년 예정으로 미 하버드대의 방문학자(visiting scholar)이자 영국 글래모건대 방문교수(external professor)로 미국과 영국을 오가고 있다. 임교수는 앞으로 4개월간 격주로 '유목민 통신'을 집필하게 된다.

편집자

지난 8월 말 서울을 떠나 영국의 카디프와 미국의 보스턴을 오가는 1년짜리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말이 좋아 '방문교수'지, 실은 피란민 생활이나 다름없다. 항상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물질적인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상대적 불편함 때문이다.

새로울 것도 없고 어차피 예기치 못한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선택한 '유목민의 삶'속에서 9·11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산다는 기분을 더욱 체감하고 있는 중이다. 1년짜리 거주비자를 받는 번거로움이야 그렇다 쳐도, 카디프의 은행에서 계좌를 여는 문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거주비자와 학교의 초청장 등 구비서류를 갖추었는데도, 수표와 직불카드를 쓸 수 있는 계좌를 열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한국에서의 주거래은행 기록을 영문으로 떼어 오라는 등 요구조건이 까다롭기 짝이 없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비용들을 모두 수표로 처리하는 관행의 영국사회에서 수표계좌가 없이 산다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엄중 항의했더니, 9·11 이후에 방침이 바뀌었단다. 테러 조직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초청 대학이 개입해 결국 계좌를 열기는 했지만 씁쓸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연고도 없이 힘없고 가난한 외국인들이 겪어야 할 어려움이 능히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하버드 야드 앞의 미국은행에서는 '합법적 외계인?(legal alien)'의 신분이지만 하루 만에 계좌를 열 수 있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심장부답다. 영국과 미국 두 은행의 태도를 비교해보니, 유럽연합의 비판에 귀를 막고 이라크에 대한 부시의 호전적 입장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토니 블레어의 '앵글로 색슨주의'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2차대전 당시 정상회담에서 "나보고 팔라(루스벨트의 애완견 이름)처럼 구걸하란 말이냐"고 루스벨트에게 벌컥 화를 냈던 처칠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서양 양안의 앵글로 색슨 세계를 오가며 살아야 하는 내게 영국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큰 관심사는 아니다. 문제는 그 상처의 불똥이 나와 같은 외국인에게 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결국 카디프의 한 은행에서 생각지도 않게 9·11 테러의 유탄을 맞은 셈이다. 그렇게 보면 앵글로 색슨의 세계에 사는 외국인들 또한 9·11 테러의 숨겨진 희생자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물론 앵글로 색슨의 주류의 관점에서 보면 한줌 '외계인'들의 불편함이야 국가보위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위험천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9·11의 반동으로 만들어진, 재판없이 사람을 구금할 수 있는 영국이나 미국의 반테러법안이 겨냥하는 것은 비단 '외계인'만이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하기는 시민권자나 외계인이나 마찬가지다.

자유를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이 포스트 9·11 징후군은 비단 영국과 미국의 시민들에게만 만연된 질병은 아니다.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헌납하도록 설득되고 강요받았던 40대 이상의 대한민국 시민들에게도 이 질병의 상흔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권력의 의도는 혹은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혹은 국민적 합의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정당화돼 왔다. 이 간단한 역설의 정당화 논리가 궁금하다면, 나치 이데올로그였던 카를 슈미트의 『독재론』(법원사, 1996)을 읽어볼 일이다. 유신헌법을 만든 헌법학자들이 왜 슈미트에게 자문을 구했는지,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면서….

한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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