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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못 가누며 양주 타령 꼴불견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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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사회 나와서 술버릇 나쁜 사람들 대부분 대학시절에 음주문화 잘못 배운 탓이죠. 복학생 선배들, 후배들에게 무작정 술먹이는 게 멋있는 거 아닙니다.

"술집에서는 매너 좋은 고객을 '스타', 골칫거리 손님을 '진상'이라고 해요. 올 때마다 외상을 한다든가, 이상한 행동으로 아가씨들을 괴롭히는 손님이 바로 진상이죠."

지난 10월 29일 연세대 교양과목 '술과 주조공정의 이해' 시간에 독특한 초청강사가 등장했다. 20년 경력의 웨이터 윤민호(45)씨가 '바른 음주문화' 특강을 자청한 것이다.

지난 9월 출간한 소설 『웨이터』(창작시대刊)의 저자이기도 한 尹씨는 매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근무하는 현직 웨이터다.

소설을 마무리하느라 요즘 더욱 바쁘다. 하지만 신문에서 음주문화에 관한 강좌가 개설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연세대 담당 교수(전무진·화학과)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단골고객이 룸살롱 외상값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모습, 신입사원이 룸살롱에 빠져들어 월급을 전부 털어넣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생들에게 바르게 술마시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는 尹씨의 열의에 田교수도 흔쾌히 응해 현직 웨이터가 대학 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남자건 여자건 항상 과음이 문제입니다. 술만 마시면 뭘 부수고 아가씨 때리고 웨이터들에게 욕하고… 사회 나와서 술버릇 나쁜 사람들 대부분 대학시절에 음주문화 잘못 배운 탓이죠. 복학생 선배들, 후배들에게 무작정 술먹이는 게 멋있는거 아닙니다."

"어느 교수님은 저희 가게에 오면 꼭 아가씨 속옷을 벗게 합니다.어떤 변호사님은 아가씨 첫 경험을 꼭 물어보구요.田교수님도 옆에 앉아 계시지만 먹물들(뭔가 배웠다는 사람들)이 룸살롱에 오면 술먹는게 더 과격합니다.판·검사,교수들 가운데 변태적이거나 과격하게 술마시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지요.여러분들 특히 조심하세요."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술을 마셨으면서도 몇 시간 동안 계속해 술을 달라고 요구하는 손님, 아가씨들에게 모욕적인 이야기를 하며 이상한 행동을 요구하는 손님…. 尹씨가 쏟아내는 이야기에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나는 그렇게 술을 마시면 안되겠구나'하는 표정이 역력하더군요."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좋은 반면교사(反面敎師)들을 소개해준 셈이다. 책을 출간할 때부터 마음 먹었던 바른 음주문화 정착이란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선 것 같은지 尹씨는 마냥 뿌듯해했다.

# 내 이름은 '윤대리'

尹씨가 처음 술병과 안주접시를 들게 된 것은 스무살이 되던 1977년이다. 당시 종로 2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술집 일이 평생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군복무를 마친 뒤 80년부터 3년간 현대건설 근로자로 중동을 다녀왔다. 적지 않은 돈을 벌어 고향인 속초로 내려가 신발장사·기념품 가게·음식점 등을 해봤지만 결국 실패했다. 중동에서 질통을 메고 비지땀을 흘리며 벌었던 달러를 모두 잃고 말았다. 실의에 빠져 소주잔만 기울이던 그에게 서울의 한 나이트클럽 간부로 있던 고향 선배가 웨이터 자리를 제안했다. 보조직을 건너뛰고 정식 웨이터로 일할 수 있었으니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제 이름을 조용필·나훈아·김대중 등 당시 유행하던 그럴듯한 이름 대신 '윤대리'로 붙였어요. 손님들이 아랫사람 대하듯이 친근하게 부르실 수 있게요. "

쑥스러워 사람들에게 제대로 말도 못 붙이면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에게 '노력하는 웨이터'라는 별칭이 붙을 때쯤엔 그도 웨이터 일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시 나이트클럽에는 단골 여성고객군이 있었다. 尹씨는 이들의 명단을 따로 가지고 있다가 인근 대기업의 괜찮은 남자 회사원들이 나이트클럽에 오면 이들에게 연락해 자연스러운 만남을 주선하는 방식으로 고객관리를 했다. 이런 만남을 통해 결혼한 커플이 15쌍. "가끔 연락하며 지금도 찾아오는 부부들이 있다"고 尹씨는 자랑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전호텔·세종호텔 나이트클럽 등이 하나둘 문을 닫고 룸살롱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尹씨도 시대의 조류에 밀려 룸살롱으로 진출하게 됐다.

업주에게 시간별로 돈을 지불하고 자신이 맡은 손님에게 들어간 아가씨들의 보수를 챙겨주는 것도 웨이터의 몫이다. 외상값을 갚지 않는 손님도 많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웨이터가 빚더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尹씨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97년 신촌에서 제일 큰 룸살롱을 차려 웨이터에서 사장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때 다른 유흥업소들과 마찬가지로 된서리를 맞고 1년6개월 만에 가게를 처분했다. 결국 웨이터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룸살롱에 대한 오해들

최근 영화나 TV에서 룸살롱을 배경으로 한 조폭의 모습이 미화되거나 과장돼 등장하는 게 尹씨에겐 걱정스러운 일이다.

"조폭들이 룸살롱에서 패싸움 하는 건 영화에나 나오는 것 아닙니까"라고 尹씨는 반문한다. 그는 최근 십수년간 서울시내 룸살롱 등 유흥업소에서 조직 간에 칼부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재미만 좇아 룸살롱을 폭력의 온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는 尹씨가 책을 내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이 바닥의 이야기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왜곡해서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는 요즘도 '5분 대기조'라는 덩치들이 업소 주변에 있긴 하지만 술집에서 난동 부리는 취객을 말리는 정도지 싸움을 일삼는 패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했다.

"룸살롱에서 일하면 쉽게 큰 돈을 모을 수 있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尹씨는 이런 소문을 듣고 연체된 카드빚을 갚기 위해 룸살롱을 찾아오는 여대생들이 부쩍 늘어 안타깝다고 했다.

옛날에는 부모의 사업 실패, 시골 동생들의 학비 조달, 양친의 병원비 마련 등의 이유로 유흥업소에 들어오는 아가씨가 많았지만 요즘엔 대부분이 빚을 갚기 위해 룸살롱을 찾는다는 것이다.

"쉽게 번 돈인 만큼 쉽게 지출하고, 그만큼 빚이 다시 늘면서 이 바닥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尹씨는 지적했다.

그는 강남 룸살롱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난 한 아가씨의 예를 들었다.

그 아가씨는 대학시절 남자친구와 함께 등록금을 유흥비로 날리고, 그 등록금을 메우느라 카드빚을 졌다. 그녀는 이 카드빚을 사채를 끌어다 갚았는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갚기 위해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로 룸살롱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의 빚을 갚고 난 뒤에도, 쉽게 큰 돈을 만지면서 씀씀이가 헤퍼지게 되고 또다른 빚들이 생겨났다. "그 아가씨는 결국 그 씀씀이를 유지하기 위해 룸살롱에 눌러앉고 말았다"며 尹씨는 씁쓸해했다.

# 이런 사람이 바로 '진상'

"자기 능력에 맞지 않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최고의 '진상'입니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안되면서 값비싼 룸살롱만 찾는 사람, 자신의 육체적 능력 이상으로 독한 양주를 계속 마시는 사람들이지요." 尹씨는 이런 사람들을 '룸살롱 중독자'라고 규정했다.

룸살롱은 부과세·특소세 등 세금이 많이 붙어 술값이 다른 술집에 비해 무척 비싸다. 서너명이 술을 마실 경우 술값이 2백만원을 훌쩍 뛰어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와 상관없이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들이 소위 '룸살롱 중독자'다. 이런 손님들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들로 인해 쌓인 외상값이 한해 2천만∼3천만원을 넘기기 일쑤라고 尹씨는 말했다.

"한번은 번듯한 사장이라는 손님이 외상값 6백만원을 남긴 채 발길을 끊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명함에 적혀 있는 대로 영등포 어느 곳의 회사를 직접 찾아가 봤죠. " 찾아가 보니 여러 소규모 업체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조그만 사무실이었고, 그나마 그 손님은 이미 잠적한 지 오래였다. 주소를 물어물어 집으로 찾아가 봤지만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앉아 있는 노파에게서 "이미 외상값 받으러 다른 웨이터들과 마담들도 다녀갔으니 뭐든지 가져갈 게 있으면 가져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야 했다.

점잖게 있다가 술과 아가씨만 나타나면 자제력을 잃는 사람들도 대표적인 진상이다. 이런 경우엔 그 가게에서 몇천만원을 넘게 쓴 고객이라고 할지라도 등 뒤에 소금 세례를 받게 마련이다. 尹씨는 인터뷰 중인 기자에게도 충고를 했다.

"기자들이 그렇게 폭탄주를 많이 마신다지요? 비싼 양주, 맛도 모르면서 섞어 마시는 것도 진상들의 행태입니다. 언제 한번 불러주세요. 특강을 해드리겠습니다."

# 봉사하는 웨이터

尹씨는 동료들의 결혼식·부모님 회갑잔치 때면 사진사로 변신한다. 사진 무료 봉사에 나선 지도 벌써 10년째다.

"함께 일하던 아가씨와 대리 운전사가 결혼을 하게 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사진촬영을 하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잘 아는 사람이 무료로 사진을 찍어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죠."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이제는 수준급이다. 직장동료들뿐만 아니라 인근 상인들도 그에게 사진을 부탁할 정도가 됐다.

尹씨는 이제 사진기술 외에 웨이터로서의 경험을 살려 사회에 봉사하고 싶다고 했다. 바른 음주문화 만들기의 전도사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연세대 강의는 시작에 불과하다.

"민방위 교육장, 기업 신입사원 교육장,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강의료요? 물론 무료지요."

김필규 기자

phil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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