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영화 제작 홍 기 선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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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일급살인''쇼생크 탈출'…. 차가운 벽에 갇힌 인간이 자유를 향해 의지와 신념을 불태우는 영화는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심으면서 오랜 세월 기억에 남게 된다. 이들은 또 대개 실화여서 더더욱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는 왜 이같은 작품을 만날 수 없을까.

부끄럽게도, 내년 초에야 우리도 이런 영화를 한 편 가지게 될 것 같다. 홍기선(44) 감독의 '선택'이다. 몸 하나 온전히 뉘기도 힘든 0.5평 독방에서 45년간을 버텨온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씨가 주인공이다. 옛 수도여고 자리에 감옥 세트를 짓고 현재 약 40%의 촬영을 마쳤다.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에 처한 선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92년) 이후 10년 만에 두번째 작품의 완성을 앞둔 홍감독. 그는 충무로에서 가장 우직하고 뚝심있는 인물이다. 동료나 선후배들이 죄다 말랑말랑한 소재에 유혹당해 사회문제를 기피하는 중에도 눈을 부리부리 뜨고 있는 '의식파' 감독이다.

"무슨 사명감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내가 잘 할 수 있고 관심있는 게 그쪽이어서 그렇죠,뭐"라며 대수롭잖게 받지만 속은 숯덩이가 되고도 남지 않았을까. 사실 '선택'은 지난해 8월 조재현·유인촌·김갑수 등 1급 배우를 캐스팅해 네번의 촬영을 했으나 제작비가 충분치 못해 접어야 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받은 제작지원금만으로는 턱이 없었고 돈을 대겠다던 제작사들도 '이야기가 칙칙하다'며 한 발 빼는 바람에 그동안 찍은 필름을 모두 버려야 했다.

"김중기·안석환·최일화·고동업·김세영·임일찬씨 등 주로 연극계에서 단련된 배우들로 다시 찍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눈물겨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임해주기 때문에 기대가 큽니다. 전화위복인 셈이지요. 감독은 영화를 찍을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지금 제가 그래요.허허허."

'선택'이 소생하게 된 데는 '엽기적인 그녀'의 제작사인 신씨네가 10억원에 이르는 제작비를 대기로 했기 때문이다.

"흥행요? 당연히 잘 되면 좋죠. '선택'은 이념적인 영화가 아닙니다. 전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장기수들 사이의 인간적인 갈등과 동료애 등, 남성 관객이 좋아할 요소가 많아요. 남자들 좀 울릴 겁니다, 허허허. "

인터뷰 내내 사람 좋은 웃음만 날렸지만, 그 너머에는 영화적 양심으로부터 '전향'하지 않겠다는 옹이처럼 굳은 심지가 선명했다.

이영기 기자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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