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앞 '낮']거리예술이 넘치는 '놀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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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의 낮은 썰렁하다. 아니, 썰렁하다 못해 황량하다. 거리를 지나가는 몇몇 젊은이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유령도시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밤의 열기를 주도한 클럽들은 재충전을 위해 셔터문을 내렸고 앤티크 숍의 가게주인은 연신 하품을 해댄다. 키치·펑크·자유·일탈…. 밤을 지배한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홍대 앞 문화는 잠들었다. 이 기형적인 모습을 아쉬워하던 사람들이 모여 의미있는 이벤트를 열었다. 지난 6월부터 매주 토·일요일 열리는 '벼룩시장'이 홍대 앞의 대낮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편집자

'생선가게'라는 간판을 내건 권민영(24)씨. 어렸을 때부터 꼼지락꼼지락 뭘 만들기를 좋아했다. 특히 자투리 천으로 만든 인형은 친구들에게 '인기 짱'이었다. 도둑 고양이를 모티브로 만들어본 '노란 고양이'는 이제 대표 캐릭터가 됐다.

그렇게 해서 가게를 차렸냐구? 아니면 잘 나가는 팬시회사의 디자이너로 채용됐냐구? 아니다. 그녀의 '가게'는 매주 토요일 홍대 앞에서 열리는 '프리마켓'의 한평 남짓한 공간이다.

"공부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넉달째 이 시장에 나왔는데, 얼마전엔 제 인형을 납품해달라는 업체도 만났어요. 장사가 안되면 속상하냐구요? 그냥 앉아만 있어도 재미있어요!"

매주 토·일요일 오후가 되면 이곳 홍대 앞 벼룩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원래 장소인 놀이터가 올 12월까지 공사중이어서 지금은 주차장 인근 공원에 임시로 자리잡았다. 구제품을 팔러나온 청소년, 물감과 스케치북을 들고 나온 화가, 알록달록 구슬을 꿰어 장신구를 만드는 젊은 직장인들이 좌판을 하나씩 꿰차고 있다. 앉아있는 사람 신나고 구경하는 사람 재미있다.

토요일에 열리는 '프리마켓(cafe.daum.net/artmarket)'은 "뭔가 재미있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취지 아래 이 지역 단체·클럽을 중심으로 한 홍대신촌문화포럼에서 탄생했다. 신촌에서 클럽을 운영하며 시장을 관리하고 있는 김영등씨는 "처음엔 외국의 벼룩시장을 본뜬 것 같아 어색했지만, 이제는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겐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 단순히 물건을 팔고사는 벼룩시장 개념에서 예술을 공유하는 '예술시장'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작가 몇몇을 빼고는 모두 어두컴컴한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썩힐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술시장은 그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구경꾼들에겐 좀 더 가까이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셈이다.

홍대 지킴이 조윤석씨가 젊은 예술가들과 의기투합해 일요일날 여는 '희망시장(www.rainbow

market.org)'도 '프리마켓'과 비슷하다. 하지만 예술적인 면보다는 구제품을 파는 벼룩시장의 성격이 좀 더 짙어 보인다.

지난 19일 '프리마켓'에는 오랜만에 밴드가 나왔다.'오르가즘 부라더스'의 준말인 그룹 '오! 부라더스'의 경쾌한 로큰롤이 활기를 더했다. 안내석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전민진(20)양도 함께 어깨를 들썩였다."낮에 하는 공연은 산만하고 집중이 안되기도 해요.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움 아닌가요. 음악 들으면서 구경도 하고 물건도 사고, 그게 자유죠."

그러나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넷째 곡 '울리불리'가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소리 끄세요, 소리 꺼요." 경찰차가 단속을 나왔다. 너무 소란스럽다는 민원이 있었단다. 순간 시장의 분위기도 썰렁해졌다. 김영등씨는 파출소에 가서 3만원짜리 '딱지'를 끊고 왔다. 관(官)이 아닌 민(民)에 의해 쑥쑥 자라고 있는 이 자생적인 문화는 그렇게 벽에 부닥쳤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김영등씨는 말했다."홍대 앞이 미술과 음악 등의 메카로 인식됐지만 정작 함께 공유하지는 못했죠.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가꾸면서 가진 것을 함께 나눈다면 그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딱지 끊더라도 고(go)예요, 고!"

낮이라도 좋다. 주말 홍대 앞엔 늘 새로움이 있다.

박지영 기자 naz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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