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善意에만 매달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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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사실 시인으로 한반도 안보상황은 위기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만일 정부와 국민 모두가 안보 불감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부시의 자제력'과 '김정일 선의(善意)'를 낙관 하려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을 것 같다.

사태의 심각성은 북한 스스로 자초한 국제적인 신뢰의 완전 상실, 대량살상무기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미국의 외교 원칙, 그리고 대북 인식에 있어서의 한·미 정부 간의 괴리 때문에 더 악성이다. 사태발전에 따라서는 한·미 동맹 자체를 부정하려는 세력의 부상으로 인해 국민적 분열이 야기되고 국가의 안보위기는 더욱 심화할지 모른다.

이제 우리 정부에 국가안보를 위한 합당한 위기인식과 나라와 국민만을 위한 새로운 자세를 갖도록 요구할 때다. 그리고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국가조직 및 운용체계의 작동상황에 대해 국민적 차원의 감시와 검증을 주장할 때라고 본다.

북한의 농축 우라늄 핵무기 개발 정보를 미국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 지난 8월부터라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특히 켈리 특사에게서 핵 개발 시인 사실을 통보받은 후 열흘 동안의 정부 태도와 국가안보 대비 태세는 문제 투성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진행은 국제법상의 모든 약속을 깨는 것이요, 화해와 협력의 동반자로 자처해 온 남측에 기만적 '이중성'을 행하는 것임은 상식 수준의 판단이 된다. 그럼에도 지난 2개월간 우리 정부가 한 일은 북측의 현란한 정치 및 선전 연속드라마 연출의 조연 및 지원자 역할이었다. 국가안보 향방에 대한 우려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오직 화해·협력 성과 제시를 통한 '햇볕정책 살리기'만이 나라를 위한 일인양 했다.

켈리 특사의 핵 개발 시인 사실 통지 이후에도 우리 정부는 북한 정권의 선의에 매달리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북한 핵 개발 확인이 몰고 올 한반도 위기 상황에 대한 초보적 인식과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케 한다. 이 모두가 우리 정부의 고위급 국가안보체계의 운용상 문제점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안보정책 과정의 최고위 조직은 국가안보회의(NSC)다. 그런데 켈리 특사가 평양을 다녀 온 뒤 열린 회의(15일)에도 북한의 핵 개발 문제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었고(18일 국방장관 국회 답변),그 이전에도 거론된 적이 없다고 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NSC 상임위원장인 정세현 통일부 장관조차 켈리가 통보한 북한 핵 시인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제8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준비해 온 통일부 당국자는 "핵 문제 같은 주요 정보에서 왕따 당한 채 회담을 준비했다니 맥이 빠진다"고 할 정도다. 그렇다면 국가안보 최고 결정 기구인 NSC는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조직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만일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의 '햇볕 제일주의' 집착에 의해 '국가안보 부문'을 중시하는 조직의 기능과 역할이 구조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면 보통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면 위기 극복의 제일차적 과제는 NSC를 포함한 국가 안보정책 운용 및 조정체계부터 쇄신해 균형을 잡아야만 할 것이 아닌가.

북한은 핵 개발 포기의 대가로 미국에 의한 체제 보장과 평화협정, 그리도 경제지원을 계속 요구하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무조건적 핵무기 개발 포기 요구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 본다. 따라서 우리 정부의 입장이 곤혹스러워질 것이다.

인식론적 수준에서 당장 정립돼야 할 안보정책 관련 원칙이 있다. 우리 국가 안보의 버팀목은 한·미 동맹(한·미 연합군으로)에 의한 억지전략(deterrence)이다. 그래서 안보 위협의 주체(주적)는 북한 정권이라는 동질 인식이 확고하지 않을 때 국가안보의 기본 축은 무너지게 돼 있다.

민족 우선주의적 감상과 전면전 발발 우려에 집착할 경우 진정한 안보력의 상실을 초래할 것이며, 오히려 궁극적인 한반도 평화에 역행할 것이다. 우리 민족 개념은 북한 정권 담당층 소수보다는 북한 인민 전체를 포괄한다는 인식을 요한다. 한반도 위기의 시발점은 전장(戰場)이 아닌 우리 내부의 균열에서부터다. 향후 한·미·일 공조는 수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가치보존을 위한 실천적 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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