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급 15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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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최근 한 기업의 임직원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부자의 기준을 10억원이라고 답했다. 부자만을 상대한다는 은행 PB(프라이빗 뱅킹)사업의 고객 기준도 대개 예금 10억원이다. 그만큼 10억원은 보통 월급쟁이가 평생 벌기 힘든 돈이다.

그런데 10억원의 1.5배인 15억원을 특별상여금으로 단숨에 거머쥔 샐러리맨이 있다. 세금도 회사에서 대신 내준다. 주인공은 일진다이아몬드 디스플레이 사업본부장 박승권(42·사진)상무. 지금까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거액의 성과급을 받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중견기업에서 CEO도 아닌 임원이 이같은 거액의 상여금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朴상무의 상여금은 미국 보스턴에 있는 바이오벤처기업 이텍스(ETEX)에 대한 투자 성공의 결실이다. 일진그룹은 1990년부터 이텍스에 1백50억원을 투자해 지분 50%를 확보한 뒤 이를 지난 4월 미국 의료기기업체 메드트로닉에 1천2백50억원을 받고 팔았다. 96년 뼈 대체용 물질인 'α-BSM'을 개발하면서 회사가치가 급상승해 이처럼 1천억원 이상의 이익을 남긴 것이다.

"89년 말 이텍스 설립자인 하버드대 이도석 교수가 투자 유치를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미 국내 대기업 몇 군데에서 퇴짜를 맞은 상태였죠. 바이오벤처란 말 자체가 낯설던 시절이라 회사에서도 선뜻 내키지 않아 했어요."

그러나 당시 29세의 패기만만한 기획조정실 朴과장은 사업계획서를 검토한 후 허진규 회장에게 갔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자신있습니다."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사례. 일진의 투자는 이렇게 젊은 과장의 배짱 하나를 믿고 시작됐다.

"뼈 대체물질이 개발되는 96년까지 큰 연구개발 성과가 없자 저도 초조해졌죠. 게다가 개발이 성공하자 미국인 고용 사장과 창업주, 소액주주들 간에 갈등이 일기도 했습니다. 나스닥 상장이 좌절되는 위기도 겪었습니다. 결국 98년 말 미국으로 날아가 직접 경영을 맡게 됐습니다."

이텍스의 총괄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신경쓴 것은 미국인 사장이 끌어들이려 했던 미국 자본을 막는 일이었다. 이 돈을 끌어들이면 자금난은 해소되겠지만, 일진이 대주주의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朴상무는 증자 대신 존슨앤존슨과 메드트로닉 등 미국 의료업체에 사업권을 팔아 자금난을 넘겼다.

터널 속을 헤매던 이텍스 운영은 2000년 겨울 메드트로닉으로부터 "매입에 관심있다"는 편지가 날아오면서 빛줄기가 보였다. 이때 朴상무의 뚝심이 또 한번 발휘됐다. 소액주주들은 "주당 6달러에 팔고 마무리짓자"고 압력을 넣었지만, 1년여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주당 11달러를 관철하는데 성공했다. 그것도 항암제·백신·유전자 치료 전달물질 사업부문은 그대로 남겨둔 채였다.

朴상무가 받은 특별상여금은 성과급 한도 5천만원이라는 일진의 사규를 '어긴' 파격이다. 지난 19일 그룹 창립기념식에서 1억원을 전달받았고, 나머지 14억원은 3년간에 걸쳐 나눠받는다. 許회장은 최근 임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해 회사에 이익을 남겨준 사람을 '백만장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15억원이라는 금액도 1백만달러의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책정된 금액이다.

"뜻하지 않게 생긴 거액을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朴상무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許회장에게 '찍혀' 82년말 일진에 입사했다.

글=이현상, 사진=박종근 기자

leehs@joongang.co.kr

<이텍스 사업 일지>

1989년 2월 재미과학자 이도석 박사, 이텍스 설립

1989년 12월 李박사, 일진에 투자 제의

1990년 12월 일진, 2백40만달러 투자

1994년 5월 1백10만달러 추가 투자

1996년 이텍스, 뼈 대체물질 α-BSM 개발

1997년 11월 일진, 3백만달러 추가 투자

1998년 12월 박승권 상무, 이텍스 총괄부사장 취임

2000년 3월 일진, 메드트로닉과 공동연구·공급계약 체결

2002년 4월 메드트로닉에 2천5백억원 지분 전량 매각 (일진 몫은 1천2백5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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