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 닮아가는 '가계 부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20세 이상 성인의 7%가 신용불량자. 올해 안에 갚아야 할 이자가 가구당 평균 2백96만원으로 도시근로자 가구의 한달치 소득 초과.'

경보가 울리던 가계대출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넘치는 자금을 낮은 금리로 앞다퉈 빌려주던 금융기관에 부실이 쌓이고, '외상 소비'의 유혹에 빠진 개인 신용불량자가 속출하고 있다.

내년에 경기가 나빠져 소득이 줄어드는 가운데 실업이 늘고 주가가 하락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동안 경기를 떠받쳐온 소비마저 둔화돼 경기침체 속 자산가격이 떨어지면서 미국식 '과소비형 가계 부실'에 일본식 '불황형 파산'을 합친 복합형 개인파산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로 나타난 '플라스틱 버블'="한국의 최대 채무자는 더 이상 재벌이 아니다. 신용카드 사용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난 4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플라스틱(신용카드)버블'이란 표현을 쓰며 이렇게 한국의 가계 부실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둔감했다. 여전히 길거리에서 카드 발급 신청을 받았고, 외상으로 물건을 사들였다. 날씨가 더워진 6∼8월에는 열기가 아파트 시장으로 번졌고, 아파트를 담보로 한 가계 대출이 급증했다. 비싼 외제가 잘 팔리고 해외여행도 붐을 이뤘다. 그 결과 1999년 이후 3년째 가계의 소비지출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앞질러 왔다.

은행 대출에 신용카드 빚을 합한 가계 빚은 모두 3백97조원, 올해 가계가 부담해야 할 이자가 42조6천1백억원이다. LG경제연구원이 산출한 가계부실지수(가처분소득에서 이자지급액이 차지하는 비율에 실업률을 더한 숫자에서 금융부채비율과 가계흑자율을 빼 지수화함, 95년 100 기준)는 4분기에 172.5로 높아질 전망이다.

"가계부실지수는 2차 석유파동이 있던 79년 무렵과 과소비 풍조가 만연했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 97년 외환위기 이후 높았다. 99년 1분기 185를 정점으로 낮아지던 게 2000년 3분기 162로 바닥을 치고 다시 높아지고 있다. 그 상당 부분 요인이 가계부채가 급증하면서 늘어나는 이자 부담이다."(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원)

◇금융기관 다시 부실해지나?=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이 1.5%선을 넘어섰다. 가계대출 잔액 2백5조8천억원 중 부실 가능성이 있는 경우가 3조2천억원이라는 얘기다.

특히 신용카드 연체율은 10%를 훌쩍 넘어서 미국(올 6월 말 4.77%)의 두배도 넘는다.

"저축률이 낮고 할부구입이 보편화돼 구조적으로 소비자파산 발생 빈도가 높은 미국보다 신용카드 연체율이 높다는 것은 우리의 잠재적인 가계 부실이 그만큼 심각함을 뜻한다."(금융감독원 장현기 경영지도팀장)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을 투입해 깨끗해지던 금융기관의 자산이 다시 오염되고 있다. 환란 때 혼쭐이 난 은행들이 기업 대출을 꺼리는 대신 경쟁적으로 확대한 가계 대출에 발등이 찍히는 격이다. 은행 대출금 중 가계 대출 비중은 6월 말 현재 47.1%로 미국(42.6%)보다 높다.

◇미국·일본 재판(再版)될까 걱정=최근 세계경제 불안의 진원지인 미국과 일본은 가계부실을 경험했다. 두 나라 모두 지나친 가계대출에서 문제가 생겼고, 소비감소와 경기부진·실업증가·사회불안의 후유증을 앓았다.

일본에선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가계 부실이 심화되면서 소비자파산이 급증했다. 90년 1만명 수준이었던 것이 98년부터 매년 10만명을 넘어섰다. 10년 넘게 경기 침체가 계속되며 실업률이 높아진 가운데 주가와 지가·임금이 동반 하락하는 바람에 잠재적 파산상태에 놓인 개인이 1백50만명으로 추산된다. 90년대 초에는 자산가격 급락과 과소비·신용카드 과다 사용 등에 따른 소비자파산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주택 마련 자금으로 대출받은 뒤 실직하는 바람에 대출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중장년층의 파산이 늘고 있다.

미국에서도 소비자파산이 94년 말 83만명에서 2000년 1백25만명으로 증가했다. 경제활동인구 1천명당 8.9명으로 일본(2.1명)보다 심각하다. 일본의 불황형 파산과는 달리 미국에선 신용카드 과다 사용과 과소비 등으로 빚을 진 사람들이 채무를 면제받기 위해 소비자파산 제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90년대의 장기 호황도 상태를 악화시켰다. 소득이 늘어나는 가운데 실업이 줄고 물가가 안정되는 등 경제여건은 좋았지만 소비자신용(외상구매)의 증가와 소비 확대로 개인파산 신청은 되레 급증했다. 개인파산의 40%는 지나친 신용카드 사용 등에 따른 과도한 부채가 문제인 과소비형 부실이 원인이다.

◇미리 충격 완화 장치 마련해야=가계대출 연체율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자 뒤늦게 금융권과 감독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가계대출 및 신용카드 이용금액의 대손충당금 적립비율을 4월에 이어 이달 초 다시 높였다. 하지만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산정에 적용하는 주택담보대출의 위험 가중치는 현행(50%)대로 두었다. 이 비율을 60∼70%로 올리면 BIS 비율이 낮아질 게 뻔한데 가계와 은행의 동반 부실을 막기 위해 일단 그대로 두었다.

주택담보대출의 담보인정 비율을 70∼80%에서 60%로 낮췄다지만 허점은 여전하다. 개인에 대한 신용평가가 주먹구구로 이뤄져 집값의 절반 이상을 빌릴 수 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갑자기 하락하면 담보가 부실해질 위험을 안고 있다.

김동호 경제연구소 기자

e-new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