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37회 피곤한 개혁-의약분업(3)>의료대란 국민 아우성… DJ "속수무책" 말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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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999년 11월 30일.

이날 오후 서울 장충체육관은 전국에서 모여든 의사들로 꽉 찼다. 대한의사협회(회장 유성희)의 '왜곡된 의약분업 저지를 위한 범의료계 규탄대회'에 참여한 의사들이었다. 비록 지역별로 '당번 병원'을 정해놓고 행사를 가졌다지만 의사들의 집단 휴진으로 환자들은 적잖은 불편을 겪었다.

이때만 해도 정부나 여론은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면서 "동네 의원 휴업 정도야-"라며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의료 대란'의 시작일 뿐이었다. 해를 넘기며 2000년 2월의 여의도 집회, 의료계 파업으로 이어진 의사들의 집단 행동은 급기야 그해 6∼7월 서울대 의대 교수들과 대학병원 전공의들마저 가운을 벗고 병원을 떠나자 엄청난 파괴력으로 사회와 정권을 강타한다.

특히 서울대 의대 교수들의 행동은 엄연한 불법이었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DJ가 의·약계 대표들을 면담하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여야 영수회담도 열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98년 8·24 의약분업안을 거쳐 99년 5·10 합의안이 나오기까지 의협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했던 의사들은 왜 그토록 과격한 행동에 나서게 되었을까.

"5·10 합의 때 시민단체들은 약화사고 책임을 법상 명확히 하고 의보수가도 현실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해 정기국회에도 법안이 상정되지 않고 수가도 안올렸다. 5·10 합의를 파기한 원인 제공자는 시민단체였다."(김종근 당시 의협 의무이사)

"김재정 의협회장과 TV 토론에 나갔을 때도 의보수가 현실화가 이슈였다. 金회장은 의보수가가 너무 낮으니 의약분업 이전에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분업을 전후해 의료계에 돌아가는 몫은 같게 하되 먼저 분업을 해본 후 그 결과를 놓고 수가를 보전하자는 입장이었다."(양봉민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어느날 약값 리베이트에 생각이 미쳤다. 의료수가는 너무 낮고, 약가수가는 너무 높고. 제약사들은 의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주고, 어느 의원은 수입의 약 30%가 약값 마진이라고 하고. 이걸 고쳐야 의약분업이 된다고 생각했다. 약가수가를 낮추고 그만큼 전액 의료수가를 올려 약값 리베이트를 양성화해야 의사들이 떳떳해지고 약 과잉 처방이 없어진다는 생각이었다. 남들은 약값 리베이트를 '비리'라고 하지만 나는 비공식 금융 메커니즘으로 봤다. 의사 한둘이 해야 비리지 모든 의료기관들이 약값으로 먹고 산다면 그건 비공식 금융 메커니즘이다."(김용익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당시 의협·시민단체를 대표했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의보수가와 약값 마진은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음과 같은 수치를 한번 보자. 77년은 우리 나라에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된 해다.

<표 참조>

보통 병원 원가의 40%는 임금이다. 표의 수치만 보더라도 정부가 20년 넘게 물가안정을 위해 의보수가를 눌러왔음을 알 수 있다. 의보수가만으로는 정상적 병원 경영이 어렵게 된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99년 당시 약값 원가에 24.17%의 도·소매 마진을 인정하는 '고시가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병·의원들은 고시가 대로 약가수가를 청구해 받는데 실제 제약사들은 고시가보다 더 싸게 약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약값 마진이 병·의원들의 음성적 수입원이 돼 왔던 것이다.

정부가 의료수가를 눌러놓은 상태에서 약값 마진으로 병·의원 경영을 꾸려가도록 묵인해 온 셈이었다.

98년 11월 12일, 참여연대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룬다. '부풀려진 보험약가로 한해 1조2천8백억원의 보험재정손실 초래'라는 보도자료의 요지는 이랬다.

▶제약사들이 보험약가를 실거래가의 평균 두배 이상 부풀리고 있다. ▶대표적 의료계 비리인 소위 랜딩비·리베이트비 등 의약품 구입과 관련된 막대한 금액의 음성적 뒷거래는 이런 부당이득을 통해 가능했다. ▶의약분업의 핵심 쟁점인 '약품의 최종 결정권을 누가 갖느냐'를 둘러싼 의사·약사간 논란의 이면에는 제약회사가 주는 음성적 자금을 누가 받느냐는 문제가 있다. ▶보험약가는 낮추고 보험수가는 올려 의료인들이 음성적 뒷거래가 아니라 정당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파문은 컸다.

참여연대의 자료는 '의보수가 현실화'와 연계된 '전체 그림'을 그리고는 있었지만 역시 자료의 비중은 '비리 근절'에 있었고, 이를 보도한 각 언론의 제목·내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약품 뒷거래 연 1조3천억원' '제약사·병원 검은 사슬 심화' '뻥튀기 보험약값 환자 바가지' '의약품 거래 부조리' 등 초점은 온통 의료계 비리에 맞춰졌다. 며칠 뒤에는 일부 언론에 '의도(醫盜)'라는 제목까지 뽑혔다.

복지부도 가만 있을 수가 없게 됐다.

해를 넘기며 99년 초부터 작업을 시작, 그해 11월 15일 복지부는 '의약품 실거래가 제도'를 시행한다.

고시가 제도를 버리고 병·의원들이 실제 약값 대로 약가수가를 청구하게 하면서 의보수가를 일부(12.8%) 올렸다.

그리고 보름 만인 11월 30일 마침내 의사들은 장충체육관 집회를 열고 집단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의약분업은 불과 7개월 뒤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99년 5월 차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나가서 보고 있자니 99년 11월 실거래가 제도를 시행하고 홍보하면서 의사들을 도둑으로 몰더라. 8·24 합의 때까진 그러지 않더니 5·10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앞장서 의사들을 도둑으로 몰았다. 세상에 의사들이 그렇게 단결할 줄 누가 알았나."(최선정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의약분업을 추진하며 의료계를 너무 몰아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략적으로 의료계의 부도덕성을 강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의사들을 감싸고 가야 한다는 걸 그때는 생각 못했다. 의료대란은 내부 합의가 별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들의 자존심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양봉민)

"나는 예정대로 집행할 뿐이었다. 내가 장관에 취임한 99년 5월에는 이미 5·10 합의가 나와 있었고, 실거래가 제도도 시기가 잡혀 있었다. 실거래가제를 시행하니 의사들이 드디어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약값 마진 없어지는 것이 피부에 와닿은 것이다. 나는 실거래가로 인한 손실은 물론 의약분업으로 인한 손실도 다 보전하고, 분업을 해본 후 결과를 평가해서 수가도 보전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그러나 그걸 안 믿더라."(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의사들은 이미 복지부와는 대화를 못 하겠다며 신뢰가 깨져 있었다. 의약분업의 본질은 분업 방안 자체가 아니었다. 본질은 의보수가 문제와 구조조정이었다. 당시 복지부 추산으로도 의보수가가 원가에 약 20% 못 미친다고 돼 있었다. 또 의료도 산업인데 이걸 대개혁을 한다면서 재정 투입 없이 되겠는가. 말하자면 구조조정 계획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경제 마인드가 담당 부처에는 없었다. 의사들은 수입 감소와 함께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김유배 당시 청와대 복지노동수석)

"의료계 파업에 대해 수차례 단독 보고할 때 대통령은 '의약분업은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나 강경 진압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롯데호텔 파업은 경찰이 진압했지만 DJ는 '의사들은 국민의 생명을 직접 다루기 때문에 강경 진압이 어렵다'고 했다."(차흥봉)

"복지부나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실이나 수가 조정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수가를 조정할 능력은 없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하는 소리를 자주 했다. 공적자금이다 외환위기다 하는 상황에서 1조원 이상이 들어갈 일에 재경부나 경제수석실이 움직일 리 없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의약분업의 타이밍을 잡은 것이 비극이었다. 수가도 수가지만 두꺼운 책 몇권 분량의 수가 규정을 합리적으로 바로 잡아 양심적인 진료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복잡하며 결국 다 재정부담이라는 것을 다들 너무나 간과하고 있었다."(손명세 연세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당시 의협 기획 이사)

의료계 파업은 이렇게 점점 더 골이 깊어만 갔다. 사회는 극심하게 분열됐다. 복지부는 2000년 4월 1일 의보수가를 4.1% 추가로 올렸지만 이는 실거래가 제도에 따른 손실보전이어서 수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제 의료계 상황은 단순히 '돈'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운동권 세대들인 대학병원 전공의들은 '양심적인 진료를 하게 해 달라'며 행동에 들어가 있었다. 약국들은 약국들대로 동네에서 병원 근처로의 대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수선하고 불안한 가운데 2000년 7월 1일 마침내 역사상 처음으로 의약분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의사가 처방한 약이 약국에 없고, 주사 하나를 맞기 위해 병원에서 약국으로 다시 병원으로 오가야만 하고, 환자들부터가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7월 말부터는 급기야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초강경으로 선회하면서 병원 응급실이 마비 상태에 빠졌다.

결국 DJ는 분업 시행 한달여 만인 2000년 8월 7일 최선정을 다시 복지부 장관으로 불러들인다.

"대통령은 '속수무책'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아무런 지침이나 생각이 없었다. 임명장 받고 차 한잔 하는 자리에서도 '지금 큰 일이니 최우선 과제로 잘 해결하라'는 지시뿐이었다."(최선정)

이어지는 최선정의 증언.

"5·10은 '고비용+(불필요한)불편' 체제였다. 이걸 다시 8·24 모델로 되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 의·약·정을 출범시켰다. 돌아설 대로 돌아선 의·약계를 참여시키느라 참 굴욕도 많았다. 시민단체들은 뺐다. 결국 주사제·대체조제 등의 문제는 8·24로 돌려놓았으나, 종합병원 약국 문제만은 풀지 못했다. 병·의원 간 내분도 문제였지만, 동네약국들이 문을 닫고 서로 돈을 모아 병원 주변에 새로 약국을 열었는데 이를 되돌리면 또 한번 대란이 벌어질 판이었다."

여기까지가 2000년 11월 11일까지의 길고 긴 사연이다.

이날 새벽 4시.

과천 청사 복지부 대회의실에서 의·약·정은 다시 한번 의약분업안에 합의한다.

결국 의약분업은 98년의 8·24 합의, 99년의 5·10 합의, 99년 말부터의 의료대란을 거쳐 2000년의 11·11 합의로 다시 8·24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해를 넘겨 2001년이 되자 의약분업과 함께 의보통합의 부작용이 맞물려 돌아가며 DJ 정부 의료개혁의 '예정된 종장(終章)'인 의보재정파탄이 닥친 것이다.

<특별취재반>

팀장:김수길 전문기자

기자:이정재·정경민·이상렬

djnomic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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