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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국립영화원(NFBC):다국적 인재 모여 창의력 겨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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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1939년 국립영화원(National Film Board of Canada·NFBC) 설립과 함께 시작된 캐나다 정부의 문화육성 정책은 21세기 문화전쟁 시대를 맞아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특히 영상문화의 핵심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메이드 인 캐나다'의 위력은 최근 주목받는 현상 중 하나다. 문화산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하려는 우리로서는 참고할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캐나다 영상문화를 주도하는 NFBC는 어떤 곳인지, 정부와 학계와 업체는 서로 어떻게 돕고 있는지,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오타와 페스티벌의 오늘과 내일은 어떤 모습인지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 7일 오후 1시 캐나다 몬트리올 서쪽 외곽의 코트 데 리세 거리. 도요타·크라이슬러 등 세계적인 자동차 전시장이 모여있는 곳이다. 그 가운데 밝은 갈색 타일로 장식된, 단출해 보이는 2층 건물이 있다. 바로 NFBC 제작본부다.

'다큐멘터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그리어슨에 의해 설립된 NFBC는 영화·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 등을 만들고 배급하는 공공기관이다. 이곳이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된 이유는 작가의 국적이나 작품 내용은 불문하고 오로지 작품성에 근거해 지원을 아끼지 않아온 데 있다. 그래서 각국의 재능있는 작가들이 캐나다를 찾았고, 이들의 작품은 고스란히 'NFBC'의 타이틀 아래 세계 영상시장을 점령해가고 있다. 그것이 캐나다의 문화적 역량 축적으로 이어짐은 불문가지다.

이중으로 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홍보담당 숀 골드워터가 기자를 당장 노먼 매클라렌(1914-87)전시물 앞으로 데려갔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리어슨의 초청을 받고 41년 NFBC에서 일하기 시작한 매클라렌은 캐나다 애니메이션의 대부로 불린다. 실사영화의 움직임을 변형한 픽실레이션, 필름을 직접 긁어 표현하는 스크래칭 등 온갖 실험적인 방법을 도입해 캐나다 애니메이션을 발아(發芽)시킨 인물이다.

골드워터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후 2년 뒤인 89년 이 건물의 이름을 '노먼 매클라렌 빌딩'이라고 바꿨다"며 "복도 곳곳에서 '노먼 매클라렌 거리'라는 거리표시판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NFBC에도 한국인 감독이 있었다. 67년 한글 자모를 이용한 애니메이션 '코리안 알파벳'을 만든 김인태씨다. 그의 작품의 음향효과는 매클라렌이 담당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더 상세한 자료는 찾기 힘들었다.

NFBC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2층에서였다. 그곳에서는 현재 애니메이션사(史)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감독들의 방을 한눈에 찾아낼 수 있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인형 애니메이션의 대가인 네덜란드 출신의 코 회드만(62)과 핀 스크린(촘촘하게 박힌 핀의 요철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크 드루엥(59)이 같은 스튜디오를 쓰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일본의 하이쿠(짧은 시조 같은 일본 전통시)를 소재로 한 '겨울의 나날들(Winter Days)'이란 공동작품을 각각 만들고 있었다. 일본 인형애니메이션의 대가 가와모토 기하치로, 러시아 유화 애니메이션의 거장 알렉산드르 페트로프 등 세계적인 감독 36명이 함께 제작 중인 대형 프로젝트였다.

회드만은 "이곳에서 일한 지 37년 됐다"며 "인형·고무·철사·모래·종이 등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이렇게 다양한 방법을 이용할 수 있었던 데는 NFBC의 격려와 지원이 컸다"고 설명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여기서 일하는 감독들은 60여명. 프로듀서가 20여명이다. 이들 작품의 저작권은 NFBC에 귀속된다. 장르는 붓으로 그린 그림에서부터 유화·모래·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독창적이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문로 퍼거슨은 컴퓨터로 입체 애니메이션을 제작 중이다. 양쪽의 색깔이 서로 다른 안경을 쓰고 보면 마치 화면이 튀어나오는 듯한 입체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대전 카이스트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에게 "세계 최초의 장편 입체 애니메이션은 83년 스티브 한이라는 한국사람이 만든 '스타체이서'"라고 설명해주자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프랑스어 제작부문에서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있는 한국계 2세 정료화씨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서로 쉽게 팀을 이루거나 조언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곳만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돈은 되지 않더라도 실험적인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는 풍토야말로 노먼 매클라렌이 세우고자 했던 캐나다 애니메이션의 본질이자 전통인지도 모른다.

몬트리올=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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