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라에서 농구드림 '덩크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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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농구공 하나 달랑 들고 농구소년이 왔다.

지난 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9월 입국한 훌리안 페르난데스(20)다. 2m의 키에 흰 피부, 힘들이지 않고 슬램덩크를 펑펑 때리는 탄력은 영락없는 서양인이지만 갈색 눈과 검은 머리는 동양적이다. 아버지(사망)는 아르헨티나인이고, 어머니(김윤숙·48)는 30년 전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동포다.

훌리안은 어릴 때부터 클럽에서 농구를 했다. 아직 체력·근력은 떨어지지만 드리블·패스·슛 등 기본기는 탄탄하다. 아르헨티나 청소년 클럽 리그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선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지난 9월 세계농구선수권대회에서 58연승을 달리던 미국 드림팀을 이긴 나라다. 키가 크고 빠른 선수가 많아 어지간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더구나 축구 때문에 농구의 인기가 한국만큼도 못하다.

훌리안은 "열정·스피드·인기가 있는 한국 농구에 반했다"고 말하지만 어머니의 나라에서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려는 게 진짜 이유인 것 같다. 의류상을 하는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계속 운동하기가 어려워 수소문 끝에 한국으로 오게 됐다.

아직 그에게 한국 문화는 낯설다. 훌리안은 "즐기면서 운동하는 아르헨티나와는 전혀 다른 훈련 강도와 선배 군기가 처음엔 무서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 '한국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훈련이 가장 지독한 '자줏빛 악마' 경희대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국적이고 핸섬한 외모 때문에 벌써부터 여학생들이 주위를 맴돈다. 정작 훌리안은 "농구로 성공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여자 쪽은 관심이 없다"고 단호하다. 삼손의 머리카락으로 생각해 목까지 내려오게 기른 한가닥 머리카락도 내년 3월 입학과 동시에 자르고 국적도 바꿀 예정이다. 한국 이름은 어머니의 성과 학교명을 따 김경희(金慶熙)로 지었다.

경희대 최부영 감독은 "신체조건이 워낙 뛰어나고 건실하며 투지가 좋다. 1,2년 정도 가다듬어 국내 최고의 파워포워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최감독은 전희철(KCC)·정훈(모비스)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

프로에선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 아버지를 둔 흑인 혼혈 토니 러틀랜드가 1998년 SK 나이츠에서 한 시즌을 뛴 바 있다.

성호준·문병주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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