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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끝:좌담회- 시리즈를 마치며> "성숙한 시민사회가 공존의 미래를 연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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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중앙일보와 경희대 NGO대학원(원장 조인원)이 공동 기획한 '문명 충돌 현장을 가다' 시리즈는 미국 뉴욕의 9·11테러 현장에서부터 시작해 유럽·중동·아시아 곳곳의 다양한 갈등 양상과 사이버 공간까지 탐방했다. 너와 나,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전통과 현대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갈등을 지혜롭게 승화시켜 함께 사는 삶을 모색하는 차이의 미학을 발견하는 현장이었다는 평이다. 기획에 참여한 경희대 교수들의 좌담을 통해 시리즈에 내포된 미래지향적 메시지와 비전을 정리한다.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며 '화해와 공존'을 가능케 하는 시민사회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는데 참석자들은 공감했다.

조인원=마무리를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니 좀 긴장된다. 지난해 9·11사태가 벌어진 순간에 뉴욕에 있으면서 파괴와 폐허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문명 충돌 현장을 가다' 시리즈는 9·11사태가 새롭게 부각시킨 화두, 즉 탈냉전 이후 문명 충돌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풀어보는 자리였다. 문명이란 개념이 복잡하고 다양한데, 일단 삶과 문화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문명의 갈등으로 볼 수 있겠다.

이동수=일반적으로 문명은 물질·정신·문화로 구성된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규정된다. 문명은 물질적 이해관계·종교·이데올로기·문화 등 여러 차원의 삶의 국면을 내포한다. 물질과 종교·이데올로기는 이해관계와 신념의 차이 때문에 충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차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의 창출이다.

김의영=문명 문제는 결국 포괄적 개념인 '차이'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번에 취재한 벨기에 지역만 해도 민족간의 차이와 충돌로 볼 수 있다.

임정근=사이버 공간도 그렇다. 새로운 문화와 기존 문화와의 차이가 갈등하고 또 공존하는 곳이다.

조=9·11테러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바로 건너편 호텔 창문에서 목격한 이후 뉴욕 사람들의 두 얼굴을 발견했다. 하나는 무서울 정도로 성숙한 시민 의식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만약 서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다른 하나는 신문을 사기 위해 자주 들렀던 기념품 상점에서 있었던 일인데, 9·11 이전과 달리 테러로 파괴된 월스트리트 건물 모형 등을 상점 맨 앞에 진열해 놓은 것이다. 재앙이 일어난 곳에서 상품을 파는 냉정한 상업주의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냉정한 상업주의, 이 둘은 미국을 상징하는 시민문화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도 바꿔 말할 수 있는 두가지 요소는 물론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표출될 때 패권적으로 변모될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연교=현장을 직접 가본 느낌은 남달랐다. 인도의 경우 카스트·힌두교 등에 대해 미신적이고 미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가보니 모두 다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제도·종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히려 중앙집권적·제국주의적 요소가 적은 힌두교와 카스트가 현대 문명에 기여할 요소가 많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른 문명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면 안된다는 것이고,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제1의 조건은 상호 이해라는 것이다.

김=그런 면에서는 벨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두 민족(플라망족과 왈롱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 '협의(協議)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다수결 제도와 달리 약자의 소수의견도 헌법으로 보장한다. 이보다 더 의미있는 것은 왕족 등 사회의 엘리트들이 함께 사는 공존의 문화를 일구기 위해 솔선수범한다는 점이다. 엘리트의 제1의 덕목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며, 이들은 두 민족의 학교에서 번갈아 가며 교육받고 두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로 지켜진다.

임=충돌과 갈등을 논하자면 사실 온라인 사이버 공간이 극단적이다. 그러나 오프라인 공간보다 다양한 문화와 그룹이 공존하며 차이를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문제는 인터넷 공간을 보는 시각의 차이다. 민주적으로 보며 활용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민주적으로 보면서 규제를 생각하는 쪽이 있다. 주목해야할 것은 최근 비정부기구(NGO)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절반 이상이 홈페이지를 개선하면서 동영상을 올리는 등 사이버 공간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에 간 기억이 새롭다. 한마디로 거기는 이민자들의 천국이었다. 연대성을 강조해서라기보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그 다름을 존중하며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단일 민족 등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단일 민족·통일 등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식이 너무 앞서다 보면 갈등의 표출 방식이 이익의 충돌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그런데 유럽에서 최근 우경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앵글로 아메리칸 문명과 유럽의 문화가 충돌하는 모습이다. 사회복지 제도를 통해 다양성을 존중해 왔던 유럽에 효율성을 강조하는 미국식 경쟁주의가 들어오면서 유럽의 딜레마가 시작됐다. 효율성을 좇아가면서 전통적 복지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희생양이 필요하게 됐다. 바로 이민자에 대한 혜택의 축소다. 이를 정치가들이 세력확대에 적극 활용하며 우경화 바람이 부는 것이다.

정=정치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하게 꼬아간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국제사회가 오히려 불간섭주의를 원칙으로 자기 나라 일에만 전념한다면 분쟁도 줄어들지 않을까.

조=국가간 혹은 민족간 대결, 그리고 국정운영과 외교정책 등에 시민들이 현실 정치와 접점을 찾으며 참여해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 의지와 합의로 형성되는 '시민사회'에서 성숙한 여론을 이끌어 가며 정치권에 침략 전쟁을 거부하는 압력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배타적이고 쟁취적인 기성 정치의 관행을 이해와 관용이 살아있는 새로운 차원의 시민정치로 전환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김=좀 정색을 해서 사회구조와 제도, 문화란 세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사회구조의 문제는 돈이 많으면 해결될 수 있다. 큰 빵이 있어 떼어주면 복지는 해결된다. 그런데 사회구조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제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다수결에도 문제가 있으니까 유럽에서 협의 민주제를 고안해 냈다. 문제는 엘리트들이 자기의 이익에 맞게 제도를 뜯어고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도를 뒷받침하는 시민사회의 문화와 교육이 중요하게 된다. 시장과 국가의 갈등, 그리고 문명간의 차이를 공존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21세기엔 시민사회에서 나온다고 본다.

임=인터넷 시대의 변화도 고려해야 한다. 정연교 교수 지적처럼 '간섭않고 내버려 두기'를 적용해야 하는 곳이 사이버 공간이다. 물론 상업적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가장 치열하게 시험해 보는 곳도 사이버 공간이다. 시민사회 운동도 사이버 공간에서 활성화될 수 있다.

조=시민운동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국가와 정부가 해온 관행을 답습하는 것이다. 시민없는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은 과거 힘의 정치, 권위의 정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공동체의 안위와 번영을 위한 보편가치를 공유하며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이 관건이다.

임=시민단체의 운동도 달라지고 있다. 국회의원 낙천낙선 운동은 네거티브한 운동이었다. 이제는 정책을 제시하고 공약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등 포지티브한 방향으로 시민운동이 변모하고 있다. 이렇게 시민사회가 정치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패권주의 시대에 국가의 영향력만 있었다면 이젠 시민사회가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사회가 국가를 견제하며 이를 통해 문명간 충돌도 방지하는 것이다. 차이를 존중하는 의식개혁도 시민사회가 성숙할 때 가능하다.

임=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시민사회의 세계화라는 화두도 대두시켰다. 마지막을 장식한 필자로서 정리한다면 '문명 충돌'을 들여다본 우리의 이번 시도는 어쩌면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와닿는다. 열심히 읽고 e-메일 등으로 반응을 보여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진행=오병상 대중문화팀장

정리=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좌담 참석 경희대 교수>

조인원(NGO대학원 원장)

정연교(철학과 교수)

김의영(NGO대학원 교수·정치학)

이동수(NGO대학원 교수·정치학)

임정근(경희사이버대학 NGO학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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