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5) 박정희 살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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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소령은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나는 ‘이제 그만 가도 좋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김안일 방첩과장이 먼저 일어나서 그런 박 소령을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를 살리는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사실 박정희 소령이 사형을 면할 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는 좌익의 발호를 부추겼던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가 분명하게 밝혀진 상태였지만, 실제 활동은 없었다. 김안일 방첩과장과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이 주도한 조사 과정에서 이는 상세하게 드러났다.

1949년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사형을 판결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선엽 당시 정보국장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난다. 1953년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할 때에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대장의 도움을 받았다. 이듬해 오클라호마주 포트실 미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시절의 박정희 준장(왼쪽)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나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박정희 소령의 구명을 부탁한 김안일 과장도 이를 설명했다. 나는 그렇다면 박 소령을 살릴 만한 명분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의 박 소령과 가장 인간적으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 김점곤 전투정보·북한과장이었다. 그는 박 소령이 좌익 연루 혐의로 수감된 이래 늘 그가 어떻게 처리될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점곤 과장은 같은 정보국에서 근무하면서 평소 깊은 친분이 있던 박 소령의 좌익 연루 혐의 사실과 조사받은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와 역시 친분이 있었던 김창룡 대위를 통해서였다.

김창룡 대위는 당시 1연대 정보주임으로 있으면서 김점곤 과장의 요원을 겸했다. 따라서 김창룡 대위는 김점곤 과장이 알고 싶어 했던 박정희 소령에 대한 조사 결과를 비교적 소상히 전해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자면 박정희 소령은 군에 입문한 뒤 남로당 군사 부문의 책임자였던 이재복에 의해 포섭당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좌익이 일으켰던 10월의 대구 폭동을 이끌었다가 죽은 박 소령의 형 박상희 또한 이미 좌익에 깊이 몸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김점곤 과장이 47년 춘천 8연대에 근무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당시 8연대 독립중대 중대장, 박정희 소령은 그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를 했다. 김 중대장에게 박정희 소대장은 여러 차례 신세를 졌다. 술을 자주 얻어 마셨던 것이다.

어느 날 하루, 박정희는 “오늘은 내가 술 한잔 내겠다”고 제의했다. 박정희는 이어 “산판(벌목업)을 해 돈을 많이 번 삼촌이 있는데 춘천에 온 김에 저녁을 모시겠다고 한다”고 했다는 것. 그날 저녁에 나타난 사람이 남로당 군사 부문 최고 책임자였던 이재복이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담비 목도리에 최첨단 유행의 비싼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이재복은 김 중대장과 박정희, 뒤늦게 연락을 받았던 연대장 원용덕 대령과 함께 술자리를 벌였다.

원 대령은 술 몇 잔이 돌아 취기가 오르자 갑자기 호통을 쳤다고 했다. “야, 정희야. 너 상놈이구나!” 박정희는 그때 정색을 하고 대답을 했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결코 상놈이 아닙니다.” 이 말에 원 대령이 “그런데 (이재복이) 삼촌이라면서 왜 성이 다르냐”라고 캐묻자, 당황한 박정희가 “외삼촌이라 그렇습니다”고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김점곤 과장은 그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박정희가 남로당에 포섭된 상태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나중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이미 박정희는 이재복에 의해 깊이 남로당 조직에 들어가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남로당에서 중요한 군사책을 맡은 것은 분명하지만 정보국의 조사 결과 그가 다른 군인들을 포섭하고 조직에 끌어들였던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그가 군대 내부에서 남로당 조직 및 포섭 활동을 한 흔적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 소령은 명동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붙잡혀 있는 동안 자신이 아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줬다. 이런 점에서 박 소령의 구명은 명분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사형 판결 상태에서 형 집행정지로 돌리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군 지휘계통을 밟아 이응준 총참모장의 재가를 얻어내야 하고, 당시 국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군의 양해도 얻어야 했다. 나는 그에 관한 검토서를 작성토록 했다. 정해진 서류를 작성해 그를 구명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던 미 고문관 리드 대위를 거쳐 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 준장에게도 동의를 받아야 했다.

로버트 준장은 즉시 답을 보내왔다. “백선엽 대령에게 일임할 테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내용이었다. 남은 것은 국군 지휘부의 재가였다. 그러나 나름의 절차를 밟다 보니 시일이 하루 이틀 미뤄졌다.

정확하게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10여 일이 흘렀을까. 상부로 보낸 서류가 왔다. 박 소령 형 집행정지를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10여 일이 박 소령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그 기다림이란 감내키 어려운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이제 그를 풀어주는 절차가 남았다. 나는 박 소령을 직접 수사하는 데 앞장섰던 두 사람을 사무실로 불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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