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트와 DJ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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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엊그제(8일)가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 서거 10주년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은 조금도 식지 않고 있다. 이날 베를린 남쪽에 있는 그의 묘소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비롯, 많은 시민들이 헌화하며 그를 추모했다.

브란트의 생애를 다시 더듬어 보면서 문득 김대중 대통령(DJ)과 여러모로 비교된다는 생각이 든다.

둘 사이엔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반독재 투쟁 경력이 비슷하다. 나치 시절 브란트가 노르웨이 등지로 망명해 반나치 투쟁을 벌였다면, 군사독재에 맞선 DJ도 미국 등지에서 본의 아닌 망명생활을 하며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둘은 또 전후 최초로 정권을 잡은 좌파 지도자였다. DJ를 좌파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유럽에선 보통 그를 '온건 사민주의자'쯤으로 분류한다. 분단국 지도자로서 화해 협력을 추구한 것도 비슷하다. DJ의 햇볕정책은 브란트의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를 바탕으로 최초의 동·서독간, 혹은 남북한간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이나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목은 아주 흡사하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린 것도 비슷하다.

이밖에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 능력이나 결코 순탄했다고만은 할 수 없는 배우자 문제(DJ는 재혼, 브란트는 3혼) 등 둘 사이엔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다. 아들이 세 명인 것도 같다.

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브란트는 1974년 기욤 사건이 터지자 두말 없이 사임했다. 또 그의 동독 지원은 '퍼주기' 논란이 일 정도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한 상호주의에 입각했다. 예컨대 동독이 정치범이나 양심수를 서독으로 추방하면 몸값조로 지원금을 주는 식이었다. 물론 야당이나 국민과도 협의를 거쳤다. 브란트는 특히 아들이나 친인척 문제로 국민의 빈축을 사지 않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무엇보다 다른 점은 국민들의 평가라 할 수 있다. 이미 생전에 정적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았던 브란트는 총리 사임 후 빈국과 부국 간의 남북문제 해결 등을 위해 노력, 정파를 초월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올 초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를 제치고 '가장 본받을 만한 정치인'에 뽑히기도 했다.

여러 여건이 비슷한 DJ가 브란트 같은 평가를 못받는 것은 DJ 개인만의 비극이 아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 모두의 비극이기도 하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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