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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금융역군 '보험 아줌마' 사라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61면

'보험 아줌마'가 사라지고 있다.

직장과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 끈덕지게 보험 가입을 권하던 억순이들이 시대의 변화에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보험 아줌마'란 속칭 대신 여성 보험설계사란 고상한 말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질 건 없다.

경력 7년의 베테랑 보험설계사 朴모(53·여)씨는 최근 지점장으로부터 "그만둬라"는 통보를 받았다. 말로만 듣던 '정리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朴씨뿐이 아니었다. 같은 지점에서 일하던 설계사 5백여명 가운데 50여명이 한꺼번에 '정리'됐다 . 그 면면들을 보면 왜 잘렸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 거의가 40∼50대의 이른바 보험 아줌마들이다.

이들은 새로 나온 복잡한 보험상품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고, 노트북 컴퓨터를 다루는 게 서투르다. 대학을 갓 나온 젊은 남자 설계사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朴씨는 그래도 서운함을 감출 수 없다. 朴씨는 "예전처럼 영업해도 실적이 괜찮았는데 무작정 나가라니 너무 야박한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보험 아줌마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줄고 있는게 현실이다.

보험상품이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연고와 성실성을 앞세운 '아줌마'식 보험영업이 더이상 먹혀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설계사를 통하지 않고 인터넷이나 전화로 보험상품을 파는 비중이 커진 것도 보험 아줌마들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내년 8월부터 방카슈랑스(은행 창구에서의 보험 판매)가 도입되는 것도 여성 설계사들에겐 위협요인이다.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1965년 1천명이 채 안됐던 여성 보험설계사는 80년대 후반부터 크게 늘어 95년에는 33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그후 인원이 점점 줄어 지난 7월에는 14만9천명까지 떨어졌다.특히 지난해부터 보험 아줌마들의 퇴장이 눈에 띄게 늘었다.

반면 남성 설계사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보험사들이 요즘 보험아줌마 대신 고학력의 남성 설계사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말 현재 남성 설계사는 1만6천5백명으로 지난해 말보다 1천8백명(12%)이 늘어났다.

남아있는 여성 설계사들도 일하기가 예전에 비해 훨씬 힘들어졌다고 호소한다.

우선 보험상품의 내용이 복잡해졌다. 전에는 은행 적금과 비슷한 저축성 보험 위주로 영업했기 때문에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종신보험 중심으로 보험시장이 재편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보험사가 고객의 돈을 어떻게 굴리느냐에 따라 보험금이 달라지는 변액보험이 나오면서 보험상품의 구조는 더욱 복잡해졌다.

설계사들은 이제 고객의 성향과 재산상태에 맞춰 금융설계를 해주는 종합 재무 컨설턴트(FC)가 돼야 한다. 외국계 보험사들은 금융 전문지식을 갖춘 젊은 남성 설계사들을 앞세워 이 시장을 공략했다.

국내 보험사들도 뒤늦게 기존의 여성 설계사들을 재교육시켰지만 나이든 아줌마들이 갑자기 전문지식을 따라잡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자 상당수 여성 설계사들이 스스로 그만두거나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밀려나고 있다.

설계사가 된 후 1년 이상 버티는 비율은 국내 보험사의 경우 네명 중 한명(24∼28%)에 불과하다. 푸르덴셜(92%)·ING(83%) 등 외국사들과 비교하면 국내 보험사들의 척박한 환경이 두드러진다.

생보협회 서창호 상무는 "해방 이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생명보험산업이 세계 6위까지 성장한 데는 '보험 아줌마'들의 공이 컸다"며 "그러나 앞으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금융 전문가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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