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뜨거운 '고급투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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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2면

미국 기업에 대해 가졌던 환상, 예컨대 양호한 투명성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이다. 그 때만 해도 엔론 스캔들 같은 것은 돌연변이 쯤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도 뉴욕 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 등 유수 언론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슈는 그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아니 훨씬 분명해지고 심각해졌다. 그 동안은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이었으나 요즘은 최고경영자(CEO)를 정식 기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엘리어트 스피처 뉴욕주 검찰총장은 9월 30일 5개 통신회사의 전·현직 CEO들을 기소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인 월드컴의 버나드 에버스도 물론 포함됐다. 이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15억달러(약 1조8천3백억원)의 이득을 뱉어내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요 뉴스라고 소개되는 것이 대형 기업들의 회계부정이나 증권사들의 투자자 속이기다. 전 대표의 탈세로 수사대상이 된 타이코의 감사를 맡았던 유명 회계법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도 요즘 연일 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타이코의 고위 경영진들이 이사회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1억7천만달러의 상여금을 챙겨갔는데, 이 과정에서 PwC는 과연 몰랐느냐는 것이 검찰의 의혹 어린 시선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정도도 몰랐다면 공인회계사들의 직무유기일 가능성이 크다. 파산한 엔론도 회계감사를 맡았던 아서 앤더슨의 묵인 또는 공모가 뒤늦게 확인된 바 있다.

내로라 하는 인재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월가이지만 이곳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고급 투전판'에 다름 아니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기엔 어림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면 좀 심하지 않으냐는 지적을 받을 일이 적지 않다.

메릴린치·샐러먼 스미스바니(SSB)·크레디스위스 퍼스트보스턴(CSFB)과 같은 금융기관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쟁쟁한 곳들이다. 그런데 이들도 기업공개와 관련, 불법행위에 연루된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투자은행 업무를 도와준 기업 임원들에게 인기 있는 공모주식을 건네준 이들 금융회사 간부를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다.

월가도 까놓고 보면 우리네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만 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위안을 찾는다면 진보는 없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실제로 더 못난 우리의 참모습을 찾고, 그걸 고치려는 노력이야말로 전진을 약속할 것이다.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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