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새 소비층 ‘노브이 루스키’를 잡아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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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24면

낭만과 공포. 서로 어울리기 힘든 이 두 단어만큼 러시아를 잘 설명하는 말은 없다. 언젠가 러시아 미술을 다룬 평론가 이주헌의 책을 접하고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라는 제목에 무릎을 쳤었다. 어떻게 보면 한 없이 서정적이고 낭만이 넘치는 나라이면서 혁명과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와 냉전시대 세계를 양분했던 강대국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여과 없이 느껴지는 곳이 러시아다. 세계를 향해 문호를 활짝 연 여타 브릭스 국가와 달리 아직도 독자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송기홍의 세계경영

1980년대 중반 개혁개방 정책 추진 이후 러시아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대 혼란을 겪었다. 급기야 98년 채무불이행(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추락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러시아 경제는 연평균 무려 30%에 달하는 명목 GDP 성장을 기록했다.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해도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고속 성장의 주 동력은 고유가에 기반한 막대한 오일달러다. 러시아는 하루 65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 세계 제2의 산유국이며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4분의 1을 보유하고 있는 자원강국이다. 푸틴 정부는 루코일, 유코스, 가스프롬 등 생산에서 유통까지 수직 통합된 석유, 가스 기업들을 통해 오일 머니를 거둬 들였다. 이 돈을 도시 계획, 주거 개선 등 대규모 투자에 활용하면서 경제 성장과 국가 자존심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자본 투자 못지않게 러시아 경제의 견인차로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민간 소비다. 옐친 대통령 시절 연 100%가 넘는 초인플레를 경험한 러시아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소비하고 보는 성향을 가지게 됐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이전 소련 시절에도 러시아 사람들은 특유의 낭만적 기질로 독특한 소비문화의 전통을 이어왔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도 문화예술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값비싼 표를 사 공연장을 찾았으며, 이는 볼쇼이 발레 등 세계적 수준의 러시아산 공연문화 상품의 자양분이 됐다.

모스크바 거리 곳곳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가판점은 ‘츠베티’라 불리는 꽃가게다. 하루 일당을 다 털어 네덜란드에서 수입한(필자가 처음 보는) 신기한 꽃들을 사 들고 퇴근하는 러시아 남자들을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노브이 루스키(신러시아인)’라고 불리는 월 평균 소득 1만 달러 이상의 계층이 소비의 주축으로 부상했다. ‘굼’이나 ‘춤’ 같은 고급 백화점은 명품으로 한껏 치장한 고객들로 늘 붐빈다. 매년 모스크바 근교의 ‘크로쿠스’ 몰에서 열리는 백만장자 박람회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다이아몬드가 박힌 휴대전화, 요트, 맞춤 자동차 등 상상을 초월하는 제품들을 구매한다.

소비 트렌드와 주요 소비계층이 바뀐 만큼 러시아시장을 노리는 한국 기업들의 대처방식 역시 달라져야 한다. 개방 초기 많은 한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에 진출해 일궈낸 성과가 개발도상국에서의 성공이었다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소비 성향이 높은 소비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신러시아에서의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초코파이나 전자레인지 등 생필품을 사기 위해 줄 서던 과거의 러시아는 이미 흘러간 얘기다. 다수의 한국 기업이 러시아에 쏟아 붓고 있는 막대한 광고비에 걸맞은 독창적인 고부가가치 상품을 통해 새로운 소비층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칭기즈칸 이후 몽골의 장기 지배로 인한 동양에 대한 미묘한 적대감과 경계심에 대국적 자긍심과 우월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슬라브인에게 신흥 공업국이 아닌 문화민족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러시아 시장 성공의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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