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안맞는 産銀 해명 의혹만 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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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① 외환銀과 긴급지원 왜 상의안했나

② 일시에 4,900억원이나 왜 지원했나

③ 당좌대월 안갚아도 왜 가만있었나

④ 자금난 상선 왜 건설에 1천억 빌려줬나

⑤ 8월 청와대 대책회의는 왜 했나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지원한 4천9백억원이 북한에 넘어갔다는 주장이 제기된 후 대출·회수 과정을 둘러싼 의혹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여러 의문과 당사자들의 해명을 종합해 본다.

◇주채권은행은 왜 빠졌나=대출이 이뤄진 2000년 6월 당시 현대상선의 주채권은행은 외환은행이었다. 따라서 현대상선이 대출받을 필요가 있었다면 제일 먼저 접촉할 곳은 외환은행이다.

그러나 본지 취재 결과 외환은행은 이 거래에서 제외됐다. 김경림 당시 외환은행장이나 이연수 당시 부행장은 27일 "거액의 대출을 요청받은 사실이 없으며, 산은이 4천9백억원을 현대상선에 대출한 사실도 몰랐다"고 밝혔다.

이는 "외환은행이 거부해 어쩔 수 없이 나섰다"는 산은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현대그룹을 담당했던 박상배 산은 부총재는 26일 "외환은행이 대출 여력이 없다고 해 나선 것이고, 이는 산은의 소임"이라고 말했었다.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거액을 빌리고도 이를 외환은행에 알리지 않은 것도 석연찮다. 현대그룹의 구조조정을 가속화하기 위해 재정경제부·금융감독위원회 등이 돈줄을 조여야 할 상황이어서 산은이 외부의 부탁이나 압력을 받고 은밀히 지원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남긴 대목이다. 이에 대해 산은 朴부총재는 "압력설은 사실 무근이며, 총재에게 보고한 뒤 영업본부장인 나의 전결로 처리했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은 법적으로는 지금도 외환은행이 주채권은행이다. 하지만 지난해 4월부터는 산은이 아예 사실상의 주채권은행 역할까지 맡고 있기도 하다.

◇산업은행은 왜 4천9백억원을 일시에 대출해줬나=산은이 그 전까지 현대상선에 해준 대출액은 총 2천6백억원 정도다. 따라서 4천9백억원이나 빌려준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산은은 "삼성카드 등 제2금융권이 현대상선으로부터 4천억원이 넘는 돈을 회수해 갑작스럽게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에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을 막기 위해 급전을 빌려주었다"고 해명했다.

또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산업은행 총재 시절 현대상선에 대한 4천9백억원 대출은 여신담당본부장 전결사항이었지만 금액이 큰 데다 현대의 유동성 위기 문제가 있어 하루쯤 고민하다 지원키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또 6월 26일에는 현대건설에도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대신 1천5백억원을 지원해준 것으로 확인됐다.

◇바로 갚아야 하는 돈인데 왜 여태껏 안갚았나=산은은 2000년 6월 7일 4천억원의 당좌대월(일종의 마이너스통장 대출)을 주면서 6월 말까지 갚으라고 했다. 만기가 다가온 6월 29일 운영자금 9백억원을 더 지원하면서 당좌대월의 만기를 9월 말까지로 늦춰줬다.

현대상선은 만기가 다가오자 상환이 어렵다고 버텼으나 산은이 강하게 나가자 9월 28일 당좌대월 3백억원을 우선 갚고 연장했다. 그리고 10월 28일 다시 1천4백억원을 갚아 총 1천7백억원을 갚았다. 운영자금 9백억원 가운데 1백억원은 지난 2월 26일에야 회수했다. 나머지 당좌대월 2천3백억원과 운영자금 8백억원은 아직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당좌대월 가운데 1천억원은 일반대출금으로 전환(대환)됐다.

이처럼 산은이 회수를 늦춘 것은 현대상선의 자금사정이 크게 개선되지 않아 일시에 자금을 회수할 경우 부도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산은은 "자동차 전용선 매각이 끝나는 10월 말이면 매각대금 15억달러로 대출 잔액을 전액 회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은 4천9백억원을 어디에 썼나=산은은 현대상선이 기업어음(CP) 상환 1천7백40억원, 선박용선료 1천5백억원, 선박금융 5백90억원 등에 대출금을 썼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상선은 대출받은 다음날인 6월 8일 현대건설에 CP를 매입해주는 방식으로 1천억원을 지원했다. 현대건설 CP 매입은 8월 말까지 계속됐다. 자금사정이 어렵다던 현대상선이 계열사를 지원한 것이다.

◇8월 청와대 대책회의가 왜 필요했나=단지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한 대출이었다면 채권단이 논의하면 되지 정부가 나설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청와대에서 관련회의가 열렸다. 당시 참석자들은 회의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자금시장안정 대책회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엄낙용 전 산은 총재가 이 회의에 참석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대그룹의 자금난이 갈수록 심해져 그 해 8월 개각으로 등장한 경제팀의 급선무는 현대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설령 자금시장안정 대책회의였더라도 현대 문제를 빼놓고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허귀식 기자 ksl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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