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폭풍우' "5시간도 짧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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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무려 다섯시간이나 계속되는 외국 연극이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다. 10월 3∼6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오셀로'가 화제의 작품이다. 극장 측은 '공연 내내 감정의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이라며 절대 지루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했다. 이같은 장시간 공연은 박동진·안숙선 등 명창들의 판소리 완창 무대에서나 가능했던 '극한의 시도'였다. 연극에선 거의 기록적이다. 물론 1980년대 영국의 명연출가 피터 브룩은 인도의 고대 서사시를 극화한 아홉시간짜리 '마하바라타'를 선보인 적이 있지만 말이다.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리투아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50)가 연출한 작품이다.

네크로슈스는 재작년 '서울국제연극제'에서 '햄릿'으로 국내 연극계에 충격을 주었다. 현재 동구권 연극을 대표하는 그는 독창적인 셰익스피어 해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유럽 최고 연출가 작품

주세페 베르디가 오페라로 만드는 등 뭇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해온 '오셀로'는 무어인(8세기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교도들) 장군 오셀로와 그녀를 사랑하는 순백의 데스데모나,그리고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둘을 파멸로 이끄는 '질투의 화신' 이아고가 엮는 3각 비련이다.

이 관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독해법은 세가지 상황에 근거를 두어왔다. 인종(흑인과 백인), 세대(늙은 남자와 젊은 처녀),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문화적인 차이가 그것이다. 이아고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사이에 존재하는 위의 세가지 '한계'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음모론자로 부각돼 왔다.

그러나 네크로슈스의 '오셀로'는 이런 상식을 깨고 작품을 보는 다른 눈을 제시한다. 이미 이 작품을 본 연극평론가 김윤철(연극원) 교수의 평가는 이 점에서 길잡이가 될 만하다.

"네크로슈스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피부색을 같게 하고 의상을 동시대·동사회적인 스타일로 처리함으로써 극의 초점과 주제에서 인종적·문화적인 차이를 제거해 버린다. 남는 것은 오로지 연령적인 차이, 즉 세대차뿐이다.

그래서 이아고의 간악한 사주 따위는 이 공연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크로슈스는 어느 나이든, 그러나 강하고 위엄있는 남자와 철없고 착한 젊은 여자 사이의 불편하고 불확실한 사랑을 그렸다."

이쯤에서 이아고는 저절로 악의 전형이라는 '누명'을 벗는다. 극중 이아고는 단순히 정신분열증적인 모습을 보이는 흥미로운 캐릭터로 다수의 변호사를 대동하고 무대에 나온다.

네크로슈스는 주인공들의 이런 다변화한 심리와 캐릭터를 나무와 땅·돌·물 등 일상적인 도구들을 사용해 시각적인 이미지로 재현한다. 등장인물들이 빠진 정서적인 소용돌이의 깊이를 재려는 듯 무대 한 가운데 거대한 자(尺)를 설치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상식 뛰어넘는 새 해석

네크로슈스는 소련에 속했다가 독립한 발트 삼국의 하나인 리투아니아 태생으로 모스크바에서 연극을 배웠다. 지금은 리투아니아 국제연극제(LIFE)와 98년 창단한 메노 포르타스 극단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 등 러시아 사실주의극을 거쳐 97년부터 '햄릿''맥베스''오셀로'로 이어지는 셰익스피어 비극 연작으로 러시아와 유럽 연극무대를 석권했다. '맥베스'로 러시아 최고 권위의 '황금 마스크상'을, '오셀로'로 폴란드 콘탁 페스티벌에서 작품상 등 네개 부문을 차지했다.

'오셀로'는 메노 포르타스 극단과 지난해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가 공동제작한 작품으로 블라다스 바그도나스(오셀로)·에글레 스포카이테(데스데모나)·롤란다스 카즐라스(이아고) 등이 출연한다. 스포카이테는 리투아니아의 현역 발레리나다.

비전문배우 사용도 특징

네크로슈스는 기자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이처럼 비전문 배우들을 쓰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직업 배우는 아니지만, 직업 예술가"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또한 그는 "셰익스피어극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데 다섯시간은 너무 짧다"며 "원작자의 의도에서 옆길로 새지 않으면서 나에게 중요하게 보이는 '어떤 지점'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3일과 5일 오후 4시, 6일 오후 3시. 2만∼5만원. 두차례의 중간 휴식이 있으며, 한국어 자막을 제공한다. 02-2005-0114.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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