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작]겉도는 지도교수제…'스승'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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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A대 1학년인 李모(19)군은 자유로운 캠퍼스의 분위기에 한껏 취해 한 학기를 보낸 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민 끝에 지도교수를 찾아가려다 포기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경우 교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결국 휴학하기로 결심했다.

B대 3학년인 K양(20)은 방학 중 모 기업체의 대학생 인턴 모집에 응시하기로 했다.그런데 그 업체가 요구하는 교수 추천서를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K양은 적극적이고 활달하지만 정작 지도교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매년 바뀌는 데다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추천서를 직접 작성한 뒤 대화를 한번도 나눈 적 없는 그 교수의 '결재'를 받기로 했다.

B대 졸업반으로 컴퓨터를 전공하는 P양은 진로를 아직 결정하지 못해 고민에 빠져 있다. 지도교수를 찾아가 상담하고 싶지만 4년 내내 한번도 해본 적이 없고, 자신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엄두를 못내고 있다.

대학교수와 학생을 연계하는 프로그램인 '지도교수제'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학생들의 방황을 부추기고 있다.

지도교수제를 시행 중인 서울시내 10여 개 대학의 학생 5백명을 대상으로 최근 설문조사(오차범위 ±4.4%)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22%(1백12명)가 이 제도의 시행 여부를 몰랐다. 또 알지만 지도교수를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는 응답이 64%에 달했다. 응답자의 41%는 교수의 상담에 불만을 나타냈다.

<그래픽 참조>

학부제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학부 인원이 워낙 많다보니 상당수 학생은 소속감이 없고 전공 선택에서 혼란을 겪는다. 선·후배를 분간하기도 힘들다.

특히 한 교수가 맡는 학생이 너무 많아 '지도교수는 있되, 카운셀링(상담)은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지난 2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01년 현재 대학 전임교수 1인당 학생 수는 평균 30.2명꼴.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포항공대(5.7명꼴)는 세계 45위에 불과하다.

숙명여대 黃모(21·경영1)씨의 말이다.

"교수님께서 맡는 학생이 많은데 제 얼굴이라도 기억하실까요. 저희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우스갯말을 합니다."

지도교수제가 허울뿐인 것으로 전락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홍보 부족이다.설문 조사 결과 약 22%(1백12명)가 지도교수제를 잘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의 무관심도 문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도교수에게 상담받은 학생(2백17명) 중 64%가 '1학년 때 의무적으로 찾아오라고 해서''별다른 목적 없이 그냥' 지도교수를 찾아갔다고 했다. 필요해 자발적으로 교수와 상담한 학생은 전체의 26%(56명)에 그쳤다.

숙명여대 許모(23·경제3)씨는 "교수님을 찾아가 봤자 나를 잘 모르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경우 성적에 지장이 있을까봐 두려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대학에서 지도교수제가 겉돌고 있는 데 비해, 일부 대학에선 새로운 방식을 채택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연세대는 학사 지도교수제, 서강대는 평생 지도교수제, 중앙대는 담임 지도교수제, 탐라대는 진로 지도교수제라는 명칭의 학생-교수 연계 시스템을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는 2000년 인문·사회·이학·공학·의치·예체능계 등 8개 계열의 광역 학부제를 도입하고, 학생의 전공 선택과 진로 상담을 전담하는 교수를 두었다. 국내에선 유일하다.

이에 따라 신입생들은 학부 대학에 소속되고 학사 지도교수와 연결돼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해 지도를 받는다. 학사 지도교수는 강의를 하지 않고 담당 학생들의 학사만 지도한다. 현재 학부 대학엔 17명의 학사 지도교수가 신입생과 전공을 결정하지 못한 2학년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교수 1인당 2백50명꼴이다. 학생들은 언제든지 담당 교수와 상담할 수 있다. 학부 홈페이지에 자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담당 교수의 홈페이지로 연결된다. 예약을 하면 쉽게 교수를 면담할 수 있다.

이 대학의 홍혜경 학사지도교수는 "학생의 50% 이상이 입학시 선호했던 전공과 다른 것을 선택했고, 수업과 상담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찾아가는 모습을 많이 봤다"고 덧붙였다.

연세대의 지난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제도에 대한 학생 만족도는 5점 만점에 4점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학생 1인당 상담 횟수도 연평균 4.9회(2001학년도 기준)였다. 그런데도 '학생 대비 교수 비율'과 '교수와 학생의 친목도모 기회 부족'을 개선해야 한다는 응답이 각각 46%,39%나 됐다. 상담에 대한 목마름으로 풀이된다.

洪교수는 "3학년생들이 뒤늦게 개인 면담을 요청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에 이 제도를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강대는 1996년 평생지도교수제를 도입했다. 재학시에는 물론 졸업 후에도 한 교수가 한 학생을 지도하는 개념이다. 2002년 입학한 경제학부 학생들의 경우 열 명이 한 교수에게 지도받는다. 교수는 한 학기에 최소한 한번씩 학생들을 만나고 개인기록카드를 만들어 보관한다.

지도교수는 학기말이면 담당 학생들의 성적표를 받고 개인지도가 필요한 학생의 경우 따로 불러 수강과목에 대해 조언하는 등 학사관리까지 해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 한 명을 추천해 장학금을 받게 해줄 수도 있다. 이 대학의 남성일(경제학)교수는 "식사를 함께 하며 분위기를 만드는 등 방법으로 어색함을 누그러뜨린다"며 "예산이 부족한 게 흠"이라며 아쉬워했다.

중앙대 서울캠퍼스는 2002년 신입생 2천1백44명에게 교수 3백43명을 '담임 교수'로 배정했다. 대학측은 업적평가 때 담임 교수에게 봉사 분야의 가산점을 주고, 면담 교수와 학생들에게 식사를 무료 제공한다.

탐라대는 교수 1인당 학생 15명을 상담 교수로 배정하고 1주일에 3시간 의무적으로 상담토록 했다. 상담 시간은 교원의 기본 수업시수에 포함하도록 학칙에 명시했다. 한남대·공주대도 이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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