産苦끝에 나온 유로화 이젠 달러 가치와 맞먹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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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우리는 이제 회원국 통화간 환율을 고정하는 일만 남겨두었다."

1997년 9월 14일 룩셈부르크. 이틀간의 회담을 끝낸 유럽연합(EU)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유럽 단일통화 출범이 막바지 단계임을 선언했다. EU 회원국이 관세 장벽이 없는 시장 통합에 머물지 않고 통화까지 단일화하기로 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5년 만에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참석자들은 환율 고정 시한을 이듬해 5월로 못박음으로써 유럽 단일통화 출범에 대한 회의론을 차단했다. 하지만 마찰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12개 회원국은 나라마다 다른 재정 상태와 경제 여건을 일정 기준에 맞추느라 진통을 겪었다.

한 나라 안에서도 경제적 주도권을 염두에 둔 중앙은행과 정치적 타결을 중시한 정부가 이해득실을 따지며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룩셈부르크 회담 며칠 전 독일에선 한스 티트마이어 중앙은행 총재가 "출범이 늦어질 수도 있다"고 말하자 헬무트 콜 총리가 즉각 "유로의 출범은 지연될 수 없다"고 응수했다.

이탈리아에선 룩셈부르크 회담 한달 뒤 집권 연립 공산당이 긴축 예산안을 거부하자 프로디 총리가 전격 사임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의 유로 가입은 물건너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혼선은 환율 고정 시한이 다가오자 다급한 나머지 빚어진 것이며, 통화 통합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유로화는 99년 1월 1일 1유로당 1.1674달러를 기록하며 국제 외환시장에 등장했으나 당초 강세를 보이리라는 예상을 깨고 이듬해 1월부터 1달러 아래로 떨어지면서 약세가 이어졌다. 한때 82센트까지 떨어졌던 유로화는 실물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한 올 초부터 상승세로 돌아서며 통화 통합의 효력을 본격 발휘했다. 드디어 올 7월 1.0038달러까지 치솟는 등 '1달러=1유로' 시대를 열었다.

이는 미국의 경기회복 전망이 불투명한 점도 있지만 통화 통합이 지역내 경제활동에 본격적으로 윤활유 역할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로화 가치가 높아지자 유로화 결제 비중이 낮은 국내 기업들은 유로화 보유 비중을 늘리고 있다.국내 기업들은 결제수단의 80% 이상을 여전히 달러화에 의존해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도가 크다.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일부 기업들은 최근 유로화 결제 비중을 5∼10%포인트씩 높였다.유로화는 이제 달러와 함께 세계 중심통화로 떠올랐다.

김동호 경제연구소 기자 e-new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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