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켜먹는 자장면과 외주제작의 공통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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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방송사의 외주 제작이 점차 늘어가는 건 그 제도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 방송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추석 특집 프로그램을 외주로 연출하면서 새삼 '입장주의'라는 말의 파장과 위력을 떠올렸다. 방송사 PD로 일할 때 갓 데뷔한 연예인이 점차 스타로 떠오르면서 그와 그를 키운 기획사가 갖는 태도의 변화를 보며 내가 자조적으로 만든 조어가 바로 입장주의다.

다소 불경스럽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집에서 자장면을 시켜먹는 상황으로 외주 제작의 현실을 비유해 보자. 시장기가 돌 때 고객은 어느 집에 자장면을 시키게 될까. 우선 거리 상으로 가까운 집. 속도는 중요한 경쟁력이다. 늦게 배달하는 집은 피하게 된다. 그 다음은 가격. 이왕이면 동네에서 오백원이라도 싼 집을 찾게 된다. 주문 받는 음식점 주인, 혹은 종업원과 배달원의 예절도 중요하다. 퉁명스럽거나 불친절하면 다시 주문하고픈 마음이 안 들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맛과 위생, 그리고 영양이다. 맛은 있는데 건강에 해가 되는 재료를 쓴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먹는 사람의 건강을 고려해 식단을 짜고 가급적 조미료나 인공감미료 대신 싱싱한 자연재료를 쓰는 게 바람직하다. 자, 이제 정리해 보자.

거리가 가깝다고 그쪽에만 잇따라 주문하는 것은 이미 서로를 아는(검증된?) 제작사에만 일을 맡기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른바 전관예우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차분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외주 제작사의 경우 사근사근한 태도보다 신중한 처신이 더 바람직하다. 제작비의 규모와 관계없이 고객인 시청자의 정신건강에 도움되는 프로를 만들려면 예술· 기술과 함께 철학이 깃들여야 한다. 물론 고객의 입맛도 철저하게 고려돼야 한다. 먹지 않는 보약은 결국 버리게 된다.

이렇게 외주 연출가로서 요모조모 의견을 피력했더니 곁에 있던 다른 외주제작사 대표가 이런 조언을 했다. 당신은 '을(乙)의 입장'임을 잊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빗장의 열쇠를 쥔 '갑(甲)의 입장'에 비해 문 앞에 선 을의 입장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을이 당당해지려면 실력(전문성과 도덕성)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갑도 마찬가지다. 그가 엉뚱한 결정을 내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가 뒤집어쓴다.

최근 프로축구의 인기가 주춤해진 이유 중에는 심판의 판정 미숙과 선수들의 페어플레이가 사라진 탓도 있다. 외주 제작을 그것에 비기면 심판은 방송사 외주 담당 PD요, 선수들은 외부프로덕션이다. 차제에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안은 어떨까.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각 방송사가 공동으로 관장하는 외주 게시판에 올리자. 물론 저작권을 보호하는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날짜· 시간이 등재되므로 누가 먼저 아이디어를 냈는지는 기록에 남는다. 방송사 외주 담당 PD는 그것을 보고 그 아이디어를 소유한 외주 제작사 대표를 부르자. 물론 그것도 각 방송사의 자유경쟁이다. 얼마 정도의 예산에 어떤 출연자를 섭외해 어느 시기까지 납품할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본 후 우선 파일럿 프로를 제작하게 하자. 그것이 시스템으로 굳어지면 자연스럽게 살아남을 건 살고 죽을 건 죽을 것이다. 방송계의 적자생존이다.

진정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독립을 꿈꾸는 방송사 PD들에게 말한다. 독립이 자유를 가져다 줄지 절대고독을 느끼게 해 줄지는 그대가 판단할 일이다. 아름다운 경쟁이 되려면 제작의 유통경로가 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방송 프로그램은 집에서 시켜 먹는 자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chjoo@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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