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웅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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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0면

해킹전쟁:무승부

"이제 마지막 공격이야?" "어 안되는데.이제 어떻게 하지?" "전혀 반응이 없어?"

"못보던 서버야. 시간이 없는데. 다시 한번 시도해 봐. 저쪽도 뚫지 못했어!"

14일 0시25분.대전시 유성구 구성동 3백73의1번지.

우리나라 정보통신·과학기술의 요람으로 불리는 KAIST 기숙사 라동 217호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었지만 다섯시간째 PC를 응시하던 세 명의 학생들은 긴장과 안타까움으로 손에 땀을 쥐었다.

같은 시간 기숙사 마동 203호실. 앳된 얼굴의 두 학생 역시 불꽃튀는 눈빛으로 PC 모니터를 바라보며 숨가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몇분 남았어?" "3분 남았어. 이제 뭘 해야 하지?" "마지막으로 전자우편을 날려봐." "하지만 처음 접하는 운영체제야. 힘들 것 같아."

마침내 0시30분. 모니터에 "수고하셨습니다. 게임 종료합니다"는 메시지가 뜨자 두 기숙사의 방에서는 "휴우…"하는 아쉬움의 한 숨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 IT 최첨단 대학인 포항공대와 카이스트 간의 '사이언스 워' 첫 대결은 이렇게 무승부로 끝났다.

"문제가 어려웠습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솔라리스 운영체제를 PC에 올려 완벽 무장을 했거든요. 이런 조합의 서버를 접한 적이 없어 뚫지 못했어요."

해킹 대회에 참가한 양교의 전사들은 똑같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5시간의 피말리는 공략에도 불구, 방어벽을 뚫지 못한 데 대한 허탈감도 감추지 않았다.

양교의 대표로 나온 선수들은 교내에서 공인받은 보안 전문가들이다. 포항공대는 보안 동아리인 '플러스' 멤버 세 명이 팀을 이뤄 출전했다. 서광열(컴퓨터공학 4년)군은 "결과에 관계없이 카이스트 학생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인 것만으로도 뜻깊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대표로 나선 이희종(전산학 2년)군도 보안연구 동아리인 '시큐리티 카이스트' 멤버. 그는 "승부는 중요치 않다. 서로 알고 배울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포항공대 김태형(컴퓨터공학 4년)군은 "카이스트 친구들을 만나 보니 좋은 후배였다"고 평가한 뒤 "이제는 경쟁과 함께 협력하는 법도 배워야겠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박형민(전기전자공학 2년)군도 "포항공대 형들의 실력이 대단하다.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지독한 공부벌레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한다. 방학 때도 대부분 기숙사에 머물며 프로그램을 짜거나 시스템을 분석하는 데 빠져든다고. 집에 가는 것은 고작 1년에 한두 차례. 기숙사에 틀어박혀 올빼미 공부와 게임을 즐기는 것이 일상생활이란다. 포항공대 손민구(컴퓨터공학 4년)군은 "이같은 교류전을 통해 서로의 취약점을 발견하고 개선방안을 익힌다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환히 웃었다.

스타크 대결:카이스트 勝

14일 새벽 1시. 카이스트 대강당이 갑자기 뜨거워졌다.해킹 대회가 무승부로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두 학교 학생들이 새벽의 적막을 깨뜨렸기 때문. 1천1백여명의 양교 학생들은 대강당을 가득 메우고 자존심을 건 두번째 '올빼미 전쟁'에 들어갔다. 이번 차례는 전통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게임은 해킹만큼이나 양교의 라이벌 의식이 강한 종목이었다. 1999년 포항공대 축제 때 한판 승부가 벌어져 포항공대가 박빙의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당시 카이스트의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카이스트는 설욕전을 철저히 준비했다. 10여개 팀이 출전해 자체 예선을 벌여 박건우(전산학 3년)·곽철빈(산업공학 3년) 팀이 대표선수로 선발됐다. 포항공대도 내부 예선에서 우승한 정일균(수학 3년)·박병재(화공 3년)팀이 출전,수성을 자신했다. 전쟁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전사들의 빠른 손놀림이 시작됐다.

"우측을 뚫어!!. 진지를 좀더 강력히 구축하고."

"와~."

"아이템이 부족해."

"와~."

"Go Go 카이스트." "으랏차차 포항공대."

대강당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게임을 보며 손에 땀을 쥐던 학생들은 해설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함성으로 응답했다. 학생들의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대강당은 환호의 도가니가 됐다. 새벽 2시30분, 캠퍼스는 짙은 어둠에 빠져 고요했지만 대강당의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양팀은 모두 '프로토스' 종족으로 대결에 임했다. 카이스트 팀은 공격적인 전략을 펼쳤고, 포항공대 팀은 공격과 수비를 병행하는 수성 전략으로 나섰다. 결과는 팀워크에서 앞선 카이스트의 2대0 완승.

"지난번 포항공대에 진 것을 설욕하게 돼 기쁩니다. 대강당을 꽉 채워 함성으로

뒷받침한 카이스트 학생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1시간여에 걸친 혈전 끝에 포항공대 팀을 이긴 카이스트 박건우군은 "승부에서 이기고 친목도 넓힌 즐거운 밤이었다"며 싱글벙글했다.

이들에게 패한 포항공대의 박병재군도 "아쉽긴 하지만 양교의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가 돼 즐겁다"며 '아름다운 패자'를 선언했다.

양팀 선수들은 '국내 예선' 통과가 더 어렵다는 한국 양궁선수들처럼 10여개팀이 참가한 치열한 교내 예선에서 1등을 해 실력을 인정받은 최고수들이다. 하지만 입학 때부터 손을 맞춰온 카이스트 팀이 실전에서 좀더 강했다. 박군과 곽군 모두 고교 때부터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대구과학고 출신인 박군과 충북과학고 출신인 곽군은 기숙사에 파묻혀 공부하면서 틈틈이 게임을 즐겼다지만, 실력은 국내 프로게이머를 능가할 정도였다. 두 학생은 그러나 "게임은 취미이고 열심히 공부해 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말했다. 포항공대의 정일균군은 "게임에서는 졌지만 공부에서는 지지않겠다"며 내년 대회를 기약했다.

★스타크래프트는 미국의 게임 개발업체인 위자드사가 지난 1998년4월에 출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에요. 게임 CD를 사서 PC에 설치해 혼자 즐길 수도 있고, 온라인으로 배려받기해 네트워크 게임을 할 수도 있어요. 지구 전사들과 외계 전사들간의 싸움이 주 내용인데, 다양한 전략을 세워야 이길 수 있어 매니어들이 즐기는 대표적인 게임으로 자리잡았지요. 전세계적으로 6백만개가 팔렸는데 그중 2백80만개가 한국에서 팔렸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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