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군대,우리의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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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말 믿을 것은 군대밖에 없군."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태풍 '루사'에 처참하게 유린된 수재지역을 안타까워하던 끝에 결론처럼 나온 얘기였다.

잃어버린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군인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든든했다. 지원제 모병을 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까지 잊고, 잘 조직된 인력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국민개병제 나라임을 다행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은근히 걱정도 됐다. 식사는 제대로 할까?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아폴로 눈병이 막사에 번지면 어떻게 하나…. 염려는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이런 걱정이 사치스러운 것임을 알게 됐다. 병사들이 평소 생활하는 군 내무시설의 실상은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자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보는 나라임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이 초라한 까닭이다. 옛 일본군이 만주에 설치한 임시막사의 형태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 첫째. 침상 내무반에서 30~40명이 생활한다. 미국·프랑스·독일 같은 서구의 나라들은 물론 일본·중국도 내무시설은 침대형. 자연히 수용인원도 적어 기껏해야 9명을 넘지 않는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내무반 공간이 한 사람당 고작 2.3㎡라는 사실이다. 체구가 비슷한 중국은 8.5㎡로 우리의 세배, 잘 사는 일본은 우리의 네배가 넘는다.'칼잠 신세'인 잠자리에 답답하기만한 공간이 우리 군의 쉼터라니! 게다가 급수시설도 변변치 못해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시달려도 취침 전 샤워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면 화장실 형편은? 내심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거니 했지만, 아이쿠! 이건 한 술 더떴다. 며칠씩 용변을 참다가 변비에 걸려 생고생을 하는 사병이 적지 않단다. 화장실은 턱없이 모자라는데 비슷한 생활습관으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데다 시간마저 쫓기니 부득이 용변을 참아야 하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다섯 식구가 사는 우리집에서도 아침이면 심심치 않게 '화장실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15명에 1개꼴인 군 화장실 형편으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터.

그래도 차림새야 어떨라구 했던 마지막 믿음마저 냉혹한 현실 앞에 산산조각이 났다. 설마 옷 값 싸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이니 입는 것에 궁상을 떨지는 않으려니 했다. 그런데 정복은 두 벌의 겨울용 군복이 전부란다. 소매를 접어 반 팔로 만들면 그게 '여름용'. 어차피 부족한 예산으로 다 갖추지 못하니 상대적으로 견디기 힘든 겨울에 맞추는 것이 실용적이라나. 그럼, 여름 군화는? 여름 군모는? 이렇게 따져 묻다가 어느새 나도 열악한 군 내무사정에 세뇌돼 군대에서 민간처럼 절기따라 차림새를 갖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자아비판까지 했다. 그런데 아뿔싸! "외국 군대는 통풍이 잘 되고 가벼운 여름용 군화와 옆면이 망사로 처리된 여름용 군모를 배급한다"지 않은가. 한심하게도 한겨울 차림새로 땡볕 속에 비지땀을 흘리며 복구작업 중인 이들이 바로 우리의 군대, 우리의 아들이었다.

지친 가족들이 가정에서 안식을 취하며 내일을 준비하듯 고된 훈련과 동원작업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내무반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성장만큼 가정의 삶의 질은 높아졌다. 청소년 시절부터 독립적인 자신의 공간에서 생활해 온 요즘 젊은이들에게 형무소 시설 규격에 맞춘 공간에서 계급의 무게까지 견디라고 한다면 군대는 영원히 '감옥'일 수밖에 없다. 내무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조리를 저지르는 주원인이 주거환경의 심한 격차에서 발생한다는 분석도 있다. 더 이상 '군대'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에게 열악한 환경을 참고 견디라는 희생만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나는 대한민국의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 요구한다. 하루빨리 내무시설을 개선하라. 그래서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을 안심하고 군에 보낼 수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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