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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노무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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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간의 흐름에 마디가 있으랴만 인위적으로 잘라 놓은 시간의 단위는 어쨌든 사람의 마음가짐과 행동 양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령 42.195㎞를 뛰는 마라톤은 10분 단위로 속도 조절이 필요하고, 중간 지점인 반환점을 돌면 선수들의 각오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5년 임기에 2년이 지났다면 현 정권은 이제 반환점을 돌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가 새해 들어 부쩍 달라졌다. 오늘까지 내비친 노 대통령의 얼굴은 불과 8일 전의 그것이 아니다. '뉴 노무현!' 어느 일간지는 2005년의 대통령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게 사실인가? 2004년의 기억과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접혀져 간 것처럼 우리의 대통령이 새로 태어난 것인가?

*** 국면돌파용 포석이면 문제

사람도 청년에서 장년으로 접어들면 표정과 행동거지가 바뀐다. '사람 됐다''철들었다' 또는 '세상 물정을 안다'는 우리식 표현에는 인생 경험에 근거한 손윗사람들의 판정이 들어 있다. 불과 8일 동안의 행보에 호들갑을 떨 것은 없지만 어조와 어휘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시선을 돌리자'거나,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화합과 관용'을 강조하고, 개혁에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는 모습은 분명 '적의(敵意)의 리더십'은 아니다. 집권 말기에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기어코 열겠다는 의지를 집약해 '선진 한국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는 공언은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선회'로까지 보인다. '선진 한국'이란 말이 케케묵은 것인들 어떠랴, 통치 스타일을 확 바꿔 엎어진 국민을 추스르고 경제 활력에 불을 댕긴다는데.

통치 스타일의 자체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이 대변혁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마당에 구태여 토를 달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 배경이 자못 궁금하다. 그것은 첫째, 2년 동안의 학습효과일 수 있겠다. 2년 동안의 공방에서 얻은 게 별로 없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을 터이고,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정치인들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내키지 않는 변신을 한다는 사실과, 결국은 경제에 유능한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몇 차례의 해외 순방에서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고무적이다. 그런데 둘째, 국면돌파용이라면 문제다. 4대 입법 공방으로 만신창이가 된 여당을 수습하고, 코앞에 닥친 보궐선거의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일, 나아가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여당 내 젊은 강경파에게 호흡을 조절하도록 여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등의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면 '뉴 노무현'을 환호하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가. 탄핵 사태부터 철야 농성 국회에 이르는 일련의 어지러운 장면이 아직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터에, 그리고 무엇보다 혈기가 펄펄 넘치는 강경파 의원이 결전을 다지고 있는 마당에 청와대만 변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국회도 '뉴 386 국회'로 변신하지 않는다면 '뉴 노무현'은 당정 분리 원칙에 살짝 몸을 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걱정은 국회에 입성한 386 의원들의 야생성(野生性)이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들의 정치 사전에는 타협도 없고 선배도 없다. 목표가 일단 설정되면 사생결단으로 밀어붙이는 행동양식은 운동권의 그것이다. 마치 들판을 무리지어 치달리는 야생마 군단을 방불케 한다. 지혜와 경험이 풍부한 정치 선배를 등에 태우지 않는다. 지난 6개월 동안 중진 의원들이 뒷전에 처져 있었던 까닭이다. 중진 의원들이 '할 일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면 이른바 '386 국회'의 내부 기류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죽했으면 창당 공신인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삼두마차가 불과 8개월 사이에 모두 낙마하고, 이부영 의장도 물러나야 했겠는가.

*** 첫째 과제는 야생마 길들이기

필자는 야생마들에게 여전히 기대를 거는 편이다. 시민을 죽음으로 내몬 국가에 대항해 거친 들판에 몸을 던졌던 이 세대의 비애를 조금은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대가 바뀐 이때 길을 잘 들이면 엄청난 괴력으로 한국을 선진국으로 끌고 갈 것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경기장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우리가 기대하는 경제 활력도 본질은 야생성이 아니었던가. 벌판에 공장을 세우고, 순식간에 도시를 만들고, 가마솥에 쇳물을 녹여 배를 건조했던 것 모두가 말이다. 386 의원들의 야생성을 길들일 유일한 조련사가 노 대통령이라면 '뉴 노무현'의 첫째 과제는 '야생마 길들이기'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