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31회 5.불패신화 現代의좌절>빅딜 후유증 하이닉스… 헐값 매각도 불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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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위원장님, 내일 하이닉스(옛 현대전자) 이사회는 잘 되겠지요? 갑자기 걱정이 돼서 연락드렸습니다."

2002년 4월 29일 저녁. 이기호 청와대 경제복지노동특보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염려놓으십시오. 잘 될 겁니다."

다음날인 30일이면 하이닉스 매각 협상 승인을 위한 이사회의 최종 회의가 열린다. 몇년간 골머리를 앓게 하던 하이닉스가 마침내 미국 반도체 회사인 마이크론에 팔리는 것이다. 매각 조건을 두고 말이 많았지만 정부·채권단의 입장은 확고했다. 매각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기호의 전화를 받은 이근영은 노파심에서 다시 한번 하이닉스 이사회 멤버들을 챙겼다. 그러나 일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금감위 실무진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박종섭 사장과 이사들의 행방이 묘연했다.

"큰일났습니다. 이상합니다. 박종섭 사장이 연락이 안됩니다."

이때 박종섭 사장은 휴대전화도 끈 채 이사 9명과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극비 회동을 하고 있었다.

4월 30일 오전 서울 영동 하이닉스 사옥 회의실. 박종섭은 이사들 앞에서 스티브 애플턴 마이크론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채권단의 하이닉스 지원안을 어떻게 봅니까."

애플턴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마이크론은 그런 지원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을 이미 냈습니다. 채권단이 양보하지 않는다니 당혹스럽습니다."

애플턴의 강경한 입장을 직접 들은 이사들은 만장일치로 매각을 반대했다.

익명을 요구한 하이닉스 이사의 회고.

"마이크론에 메모리 사업 부문을 팔고 남게 되는 비메모리 사업 등 하이닉스 잔존 법인의 생존 여부가 관건이었다. 채권단의 지원안으로는 잔존 법인이 도저히 살 수 없었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공문을 두차례나 내용증명으로 보냈지만, 채권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주와 종업원에 대해 아무런 보장이 없는 매각 협상을 승인해줄 수는 없었다. 마이크론도 이런 조건이면 이사회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박종섭과 하이닉스 이사들은 어차피 안될 것으로 보고 매각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시각은 다르다.

익명을 요구한 금감위 고위 관계자의 회고.

"朴사장은 자신이 책임지고 이사회를 통과시키겠다고 몇차례나 약속했다. 잔존 법인 지원 문제도 채권단과 추후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로 이미 논의를 끝낸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판에 朴사장이 뒤집을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석연찮은 이유로 하이닉스 매각은 마지막 한걸음을 남겨놓고 틀어졌다. 그 뒤 4개월여, 하이닉스는 정부·채권단의 매각론과 소액주주·노조 등의 독자생존론이 맞서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불과 2년 전까지 세계 2위의 잘 나가는 반도체 회사이자 현대그룹 최후의 보루로 불리던 하이닉스의 운명이 어째서 이렇게 꼬이게 됐을까.

위기의 신호탄은 2000년 8월 반도체 시장을 강타한 불황이었다. 16달러였던 128메가SD램 값이 넉달 뒤인 연말엔 5.76달러까지 떨어졌다. 반도체값 1달러 하락은 당시 하이닉스엔 연 평균 10억달러의 손실을 의미했다.

더구나 하이닉스는 이른바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현대투신과 현대건설에 닥친 자금난으로 그룹의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하이닉스 관계자의 회고.

"하이닉스는 1999년 10월 빅딜로 LG반도체의 차입금과 인수 대금 등 6조원을 떠안았다. 합병 후 매출은 6조원대였는데 총 부채는 11조원이 넘었다. 게다가 LG반도체가 외환위기 때 무더기로 발행한 회사채 만기가 2000년 말부터 속속 돌아왔다."

2000년 11월 20일.

정몽헌(MH)회장은 현대전자를 2001년 상반기까지 현대그룹에서 분리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모(母)회사인 현대건설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현대그룹 관계자의 회고.

"MH는 자신이 세계적 반도체 메이커로 일궈낸 현대전자에 대한 애착이 컸지만, 건설이 늪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전자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손 벌릴 곳이 없어진 현대전자에 씨티은행이 앞장서 은행권에서 1조원의 공동대출(신디케이트 론)을 추진, 8천억원을 조달해줬지만 소용없었다. 갚아야 할 회사채는 2000년 12월에만 5천억원, 2001년엔 3조3천억원이나 됐다.

현대전자는 마침내 '법정관리' 카드를 꺼내들었다.

2000년 12월 22일,청와대 서별관 회의실.

"현대전자가 신디케이트 론 2천억원을 어제 갚았습니다. 회사채 문제를 그대로 두고선 돈을 빌려준 은행에만 피해를 준다는 겁니다. 이대로는 법정관리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연수 외환은행 부행장의 보고에 이어 강기원 금감원 부원장보의 말이 계속됐다.

"회사채는 현대전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두면 채권시장 전체가 결단날 판입니다."

실제 당시 자금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외환위기 때 발행한 회사채가 한꺼번에 몰려나온 탓이었다. 2001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는 65조원이나 됐다.

나흘 뒤인 12월 26일 정부는 '회사채 신속 인수제'란 해법을 내놓았다. 만기 회사채에 대해 해당 기업이 20%만 갚으면 산업은행 주도로 은행권에서 나머지 80%를 인수해주는 제도였다. 이를 두고 나라 안팎에서 '신(新)관치금융'이란 따가운 질책이 쏟아졌지만 하이닉스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한숨 돌린 하이닉스는 이듬해 해외 투자자를 상대로 주식예탁증서(GDR) 발행에 나선다. 재무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2001년 6월 15일, 12억5천만달러(약 1조6천억원)어치의 GDR가 발행됐다. 기대 밖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더 커졌다.

박종섭의 회고.

"간신히 GDR 발행에 성공했지만 그 직후 반도체 값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허사가 됐다."

하이닉스는 결국 또다시 채권단에 손을 벌려야 했다. 그러자 정부·채권단은 하이닉스의 자력 회생 가능성을 원점에서 되짚기 시작했다.

이덕훈 당시 한빛은행장(현 우리은행장)의 회고.

"하이닉스는 재무구조가 안 좋은 데다 2001년 내내 투자도 못했다. 채권자 입장에서 자력 회생·매각·청산 등 세가지를 놓고 몇달을 검토한 결과 매각으로 결론이 났다. 9월께 이를 정부에 이야기했다."

이때부터 하이닉스 매각은 급물살을 탄다.

2001년 10월 31일.

박종섭은 극비리에 단신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최대 라이벌인 마이크론에 하이닉스 인수를 제의하러 가는 길이었다.

반도체 경기 침체로 고전하던 마이크론은 박종섭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제 협상은 쉽지 않았다. 2002년 1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시의 한 로펌 사무실. 하이닉스 채권단과 마이크론 관계자들이 마주앉았다.

"우리는 하이닉스 메모리 부문의 적정가격을 47억달러로 보고 있습니다."(드러스트 외환은행 수석부행장)

채권단의 제안에 대해 마이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봅시다."(빌 스토버 마이크론 부사장)

이연수의 회고.

"3시간쯤 뒤 마이크론은 우리 제안을 거절했다. 다음날 42억달러로 제안 가격을 낮췄으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협상이 어렵다고 보고 다음날 귀국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2월 초. 세계 4위 반도체 회사인 독일 인피니온의 울리히 슈마허 회장과 실사단이 하이닉스와의 제휴 협상을 위해 잇따라 방한하면서부터.

몸이 단 마이크론은 인수가를 40억달러까지 끌어올렸다.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 관계자의 회고.

"메모리 부문의 자산만을 인수(P&A)하겠다는 마이크론과 달리 하이닉스를 통째로 인수·합병(M&A)하겠다는 인피니온의 조건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피니온 이사회의 반대로 협상이 깨졌다."

인피니온이 손을 들자 상황은 다시 역전됐다. 마이크론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마이크론은 40억달러의 인수 대금을 자기회사의 주식으로 주겠다고 했다. 게다가 채권단이 15억달러를 신규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

협상은 삽시간에 꽁꽁 얼어붙었다. 때 맞춰 반도체 값이 오름세를 타면서 국내에선 독자생존론이 떠올랐다. 마이크론에 파는 조건이면 독자생존도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채권단과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진념 당시 부총리의 회고.

"독자생존의 관건은 신규 투자였다. 하이닉스는 2조5천억원 이상의 신규 투자가 필요했지만, 은행들은 한사코 꺼렸다. 마이크론이 인수해 생기는 신설 법인은 재무구조가 건전해져 지원이 가능하지만, 하이닉스엔 돈을 넣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정부가 지원에 나설 수도 없었다."

이같은 정부-채권단의 판단은 그대로 DJ에게 보고됐다.

한 정부 관계자의 회고.

"대통령은 '해외매각 밖에 살 방법이 없다는데 왜 매각이 빨리 안되느냐'고 독촉했다."

마이크론은 이런 정부·채권단의 방침을 꿰뚫고 있었다. 2002년 4월 15일, 마이크론은 요구사항을 빨리 매듭짓지 않으면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사흘 뒤인 4월 18일. 정부와 채권단은 황급히 이덕훈 한빛은행장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해 박종섭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도록 한다.

다시 이덕훈의 회고.

"애플턴 회장은 '마이크론 주식가격은 35달러 아래로는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나왔다. 협상을 깨지 않는 이상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금감위도 협상 결렬을 원치 않았다."

4월 22일.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마침내 매각 양해각서(MOU)를 발표했다.

매각 대금은 마이크론 주식 1억8백60만주. 양사는 주당 35달러로 쳐서 38억달러라고 했지만, 당시 마이크론 주가(주당 29.5달러)로 따지면 32억달러에 불과했다. 두달여 전 제안한 40억달러보다 8억달러가 적은 것이었다.

4월 29일, 채권단은 우여곡절 끝에 MOU를 승인한다.

익명을 요구한 채권단 관계자의 회고.

"MOU대로 하면 채권단이 회수할 수 있는 돈은 20억달러도 안됐다. 청산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러나 매각 무산 때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과 채권단에 쏟아질 비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MOU를 승인했다. 정부도 MOU가 통과돼야 한다는 뜻을 강력하게 전달해왔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다음날 '이사들의 반란'으로 하이닉스 매각은 결국 불발로 끝난다. 현대건설·현대투자신탁에 이어 현대그룹의 마지막 자랑거리였던 현대전자마저 주인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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