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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으로 본 일제시대 사회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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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 1919년 3.1 운동 직후 한 재판정의 모습.[법원행정처 제공]

법원도서관은 6일 1909년부터 43년까지 대한제국 대심원과 일제 통감부.조선총독부의 고등법원에서 선고된 민.형사 사건의 판례집인 '고등법원 판결록' 30권 중 제1권(1909~12년)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대심원은 1908~1909년 10월까지 존속한 대한제국의 최고법원으로 그 뒤 일제 통감부에 의해 고등법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다음은 판결록에 들어있는 주요 사건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 군자금 모금을 강도죄로 처벌=무장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은 21세이던 1911년 북간도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서울 돈암동에 살던 종증조부 김종근을 찾아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김 장군은 "주범이 아니었고, 집안에 사람이 많아 일을 벌이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안승수 등 사람들을 이끌고 재물을 강취하려고 공모했다"며 "강도죄는 주종을 구분하지 않고 처벌한다"면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 창녀의 매매계약은 유효=1911년 한 일본인 매춘업자에게서 창녀를 샀던 사람이 매춘업자를 상대로 대금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당시 법원은 "창녀는 일정한 단속 하에 그 존재가 인정된다"면서 "창녀를 매개로 금전거래를 하는 것은 사회질서나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무효라고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 첩의 자식도 아버지가 양육비 부담=1912년 오모씨가 아들의 양육비를 죽은 방모씨의 가족에게 청구했다. 고등법원은 "조선의 관습은 아버지가 자식을 부양할 의무를 진다"면서 "방씨의 첩인 오씨가 따로 살면서 사생아를 부양하는 데 든 비용은 나중에라도 부(父)가 부담해야 한다"면서 오씨의 손을 들어줬다.

◆ 양반은 노비이름으로 땅 매매=함경도에 살던 양반 백모씨는 자신의 땅을 팔기 위해 하인에게 대신 매수자를 찾아보라며 패지(牌旨.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권한을 넘긴다는 증명서)를 써줬다. 하인은 땅을 사겠다는 양반 유모씨에게 패지를 넘겼다. 그러나 유씨가 계약하려 하자 백씨는 마음을 바꿔 땅을 팔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유씨는 '패지는 매매 위임장이나 마찬가지'라며 소송을 냈다. "

하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거래를 할 정도로 양반들은 체면과 형식을 중요시했다. 이 재판에서 대심원은 "사대부는 토지.가옥 매매시 패지를 작성하면서 자기 이름 대신 노복(奴僕)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관례"라며 "패지는 매수인을 찾으라는 명령서이자 제3자에 대해서는 매매 유인장에 지나지 않는다"며 매매계약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김종문 기자

*** 사법권 1909년 일제 손에

우리나라 근대 재판제도의 출발은 행정기구와 사법제도가 분리된 갑오개혁(1894년)이다. 그러나 1907년 일제 통감부가 재판소 구성법을 제정하면서 골격이 갖춰졌다. 1심은 지방재판소, 2심은 공소원, 3심은 대심원이 나눠 맡아 본격적인 3심제가 채택됐다.

일제는 1909년 조선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 처리권을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기유각서 체결 이후 통감부 재판소령을 제정, 3심인 대심원의 이름을 고등법원으로 바꿨다. 일본 내 최고 재판소가 대심원이어서 조선의 최고 재판소 격을 낮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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