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인들, 술꾼이 없구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없다. 막말로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것도 이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로 시인 고은(高銀·69)씨가 계간지 『시평』 창간호(가을호)에 낸 '시의 벗들에게'라는 편지에서 장탄식을 토해냈다.

高시인은 말한다. "도연명과 이백, 그리고 두보는 중국문학의 근본에 술이 얼마나 깊이 관련되는가를 자랑한다. 시와 술이 혼연일체가 된 게 그들 고대(古代) 서정의 광활한 세계였다."

어디 옛 시인들뿐이랴. 고(故) 조지훈(趙芝薰)시인은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글에서 술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격조· 품격· 스타일· 주량에 따라 주도를 열여덟 단계로 나누었다.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먹는 부주(不酒)에서부터 술의 진미에 반한 기주(嗜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장주(長酒),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폐주(廢酒·열반주)에 이르기까지.

高시인은 "술의 고전적 의미가 모독당하는 것과 함께 시적 절실성이 자꾸 감소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술과 함께 기이한 삶을 살다간 '귀천(歸天)'의 시인인 고(故) 천상병(千祥炳) 등 숱한 선배들이 그리운 탓일까. 후배들에 대한 高시인의 당부가 계속됐다.

"부디 시의 위기를 외부에서 찾지 말기 바란다. 첨단문명이나 영상문명, 산문의 폭력과 시장주의에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인간으로부터 시가 멀어져 가고 있는 현실도 시 쪽의 책임이라는 내재적 인식이 필요하다."

『시평』은 무크지 형식으로 8호까지 나오다 정기 간행물로 창간됐다.

김영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