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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목장의 결투에서 이기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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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호 34면

‘콜롬비아’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커피, 미인, 게릴라, 마르케스, 볼리바르.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게 하나 또 있다. 바로 동아시아를 향한 구애다.

이양수 칼럼

이달 초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를 방문했을 때였다. 옥스퍼드대 박사 출신인 자이메 베르무데즈(44) 외교장관은 “콜롬비아의 미래는 아시아에 달려 있다”고 단언했다. 동아시아 기자 6명을 40분간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는 “다음 달에 정권이 바뀌면 민간 분야로 돌아가지만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동아시아의 재발견이었다.

그가 외교장관으로 일해 온 2년간 콜롬비아 정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가입을 비롯해 한·중·일·인도와의 경제 협력 확대를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한·콜롬비아 자유무역협정(FTA)은 그런 노력 중 하나다. 현지에서 만난 정·재계 인사들은 “우리는 이제 대서양 국가가 아니라 태평양 국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꽃과 커피·에메랄드·에너지·낙농제품을 팔고, 동아시아 자본을 유치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구상이다. 콜롬비아에선 대졸 초임이 88만원 안팎에 불과하다.

지구의 반대편 중남미에서 본 동아시아는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기관차로 자리 잡았다는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한국·중국·일본의 경제 규모는 올해 10조8100억 달러. 미국의 14조2500억 달러를 뒤쫓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추정한 명목 국내총생산(GDP) 추정치다. 2020년께 세계 최대 경제권으로 부상할 동아시아는 중남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놓쳐서는 안 될 ‘특급열차’다.

그러나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 주변 정세를 뜯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과연 한·중·일이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 미·중이 경쟁과 협력의 틀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천안함 이후 중국의 북한 편들기가 심해지면서 ‘동아시아 공동체’ 낙관론은 힘을 잃고 있다.

천안함 사태는 한·미·일과 북·중의 오랜 대립 구도를 재확인했다. 미·중은 유엔 안보리,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외교전을 펼친 데 이어 새로운 대결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올가을 열릴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미국이 새 회원국으로 참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은 EAS(아세안 10개국+한·중·일+호주·뉴질랜드·인도) 발족에 소극적이었다. EAS가 ‘동아시아 경제협력체’를 지향하고 있지만 자칫 미국이 배제되면 동남아를 중국의 앞마당으로 내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또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아시아 중시 외교’를 펼친다. 미국의 EAS 가입을 계기로 동아시아 전선에서 미·중 간의 신경전은 뜨거워질 전망이다.

이럴 경우 한반도 정세는 복잡다단해진다. 김정일 체제는 중국을 등에 업고 ‘동네 깡패’처럼 행세할 가능성이 크다. 서부영화 ‘OK목장의 결투’에선 악당에 맞서 서로 손을 잡은 총잡이와 보안관을 영웅으로 그린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영원한 선악 구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안함 사태 뒤 우리 사회는 김정일 체제의 호전성을 똑똑히 지켜봤다. 동시에 대결과 압박만으론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교훈도 얻었다.

중남미 유일의 6·25전쟁 참전국 콜롬비아는 그런 점에서 반면교사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뒤 200년간 끝없는 전쟁과 내전, 테러로 인해 나라 경제는 한때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밤중에는 길거리에 인적이 끊길 만큼 치안이 불안하다. 친미 우파 정권의 좌익 게릴라 소탕작전에 반발해 이웃 나라 베네수엘라는 며칠 전 단교를 선언했다. 평화의 가치는 그만큼 소중하다.

천안함 사태 넉 달을 지나면서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천안함 출구전략’을 거론한다. 일각에선 남북 정상회담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남북 대결 구도를 미봉하는 전략만 생각해선 곤란하다. 호랑이 같은 용맹도, 여우 같은 교활함도 갖춰야 한다. 김정일 체제는 물론 후진타오(胡錦濤) 체제의 중국까지 움직일 수 있어야 제2의 천안함 사태를 막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질서의 새 틀이 될 EAS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혈맹의 감성으로 무장한 중국과 북한을 더 큰 무대로 끌어내야 한다. 동아시아 공동번영의 논리로 설득해야 한다. 그것이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극복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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