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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2>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6.'맨발의 청춘' 빅 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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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나의 첫 영화 주제곡인 '맨발의 청춘'이 히트하자 나도 신성일·엄앵란 커플만큼 바빠졌다. 흥행사들은 영화 주인공인 신·엄 커플과 나를 엮은 쇼를 구성해 전국 순회 공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흥행사 중에 프린스·무랑루즈·쇼보트·국제 등이 이름을 날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쇼 '맨발의 청춘'은 아마 프린스가 맡지 않았나 한다. 우리는 약 한달 일정으로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았다.

광주에서 공연을 마치면 그날 밤 곧바로 마산으로 달려가 다음날 공연을 하는 식의 강행군이었다. 한밤 중 남도의 비포장길을, 그것도 덜덜거리는 승용차를 타고 달려가 목적지에 내리면 제대로 다리를 펼 수조차 없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흥행사들 사이에는 세 사람이 들어간 포스터만 붙여도 흥행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그런 무리도 감수 할 수밖에 없었다. 1964~65년 무렵의 일이다.

쇼에 가장 열광적인 도시는 '빛고을' 광주였다. 부산·마산·대구도 대단했지만, 그 반응의 강도에서 광주를 따르지 못했다. 서너배는 더했다. 그때부터 문화적 감수성에 관한 한 이곳 사람들은 뭔가 특이한 기질이 있는 모양이란 생각을 했다.

쇼가 있는 날이면, 이곳 극장 앞은 몇시간 전부터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예외없이 소방차가 동원됐다. 질서를 잡기 위한 명목으로 물대포를 쏘는데, 이게 도무지 먹히질 않았다. 흩어지는 듯하면 또 모이고, 하는 육박전이 반복됐다.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쇼는 영화 '맨발의 청춘'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신·엄 커플의 연기, 촬영 일화 소개, 그리고 나와 동료 가수들의 노래 등으로 꾸며졌다. 물론 신·엄 커플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맨발의 청춘' 주제곡을 부르곤 했다. 스타였지만 두 사람 모두 조심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씨가 툭툭 말을 던지면, 엄씨는 이를 잘 추스르는 포용력이 뛰어났다.

쇼에 대한 반응은 물어보나마나였다. 술렁이던 객석도 신·엄 커플이 등장하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너무 충격적이다 보면 갑자기 말을 잊는 경우와 같다고 할까. 미친 듯이 열광하는 요즘 사람들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그들의 연기에 혼을 빼앗겼다.

노래는 역시 이런 긴장을 풀어주는 당의정 같았다. 내가 나와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맨발의 청춘'의 첫 소절을 시작하면 분위기는 확 반전됐다. 객석에서는 추임새를 넣으며 따라 하는 이도 나왔다. 열일곱살 새색시마냥 수줍던 그때의 여성들이 몇년 뒤 클리프 리처드 공연에서 등장한 '오빠부대'의 싹을 보인 것은 아닐까.

요즘도 '맨발의 청춘'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캐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영화나 노래 마찬가지다. 당시엔 이와 직접 관계된 사람으로서 그런 의미조차 부여받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사실 바쁜 일상에서 그런 기미를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나서 보니 '맨발의 청춘'에는 뭔가 특별한 기운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순수한 젊음의 반항과 열정'을 대변하는 기운 말이다. 노래는 젊은이들의 술자리에서 시대의 울분을 삼키는 '단골안주'로 불려졌고, 영화에서 시대를 앞서 간 청바지 차림으로 열심히 춤을 춘 트위스트 김은 두목(신성일) 못지 않게 정처없는 젊음을 상징하는 시대의 증표이기도 했다. 신성일은 미국 영화 '이유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이나 다름없었다.

영화와 노래가 나올 당시는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가 핫이슈였다. 이를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분출했던 시절이다. 60년 4·19 이후 이들은 이른바 '6·3세대'라고 불리며 한국사회 변혁의 동력 구실을 했다.

비록 깡패이야기였지만, 당시 젊은이들은 기성 가치관에 저항한 '맨발의 청춘'에 자신들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데모를 하다가 잡혀가던 젊은이들이 운동가요 삼아 '맨발의 청춘'을 부르곤 했다는 이야기에서 나는 그런 기운을 느꼈다. 70년대의 '아침이슬'이 했던 구실을 60년대에 이 노래가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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