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문 나서면 멋진 아티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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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1면

30년 교사 이력보다

더 오랜 35년 연주경력

친구가 맡긴 색소폰

호기심에 불어본 게 인연

프로들 연주법 훔쳐보며

연습, 또 연습…

지역 음악회 단골 출연

이젠 부산의 유명인사

부산 혜광고 정희규(鄭嬉圭·56)교사는 '색소폰 부는 수학 선생님'으로 통한다. 그는 35년간 색소폰을 불고 있다. 교단에 선 지 30년인 그는 교사 이력보다 색소폰을 입에 대기 시작한 것이 더 오래됐다.

매년 11월에 열리는 학교 축제 때면 그는 항상 단골 게스트로 초청돼 학생들에게 색소폰을 들려준다. 지난 6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열린 소규모 음악회 무대를 비롯한 지역 문화행사에도 수시로 얼굴을 내민다. 그만큼 鄭씨의 테너 색소폰 연주는 수준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니보이''로라'를 비롯해 4분의5박자인 '테이크 파이브'도 무난하게 소화한다. 특히'동백아가씨''목포의 눈물'등 트로트 계열의 곡은 못하는 게 거의 없다.

"친구인 방송국 색소폰 연주자와 함께 음악회에 나갔다가 청중에게서 비슷하게 박수를 받았다"는 말로 그는 자신의 실력을 넌지시 일러준다.

그가 색소폰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1년 때인 1966년 무렵. 친구의 사촌동생이 군입대하면서 두고 간 색소폰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해 한번 불어본 것이 인연이 됐다.

그의 색소폰 연주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내듯 순전히 독학으로 익혔다.

당시엔 색소폰 연주를 가르쳐줄 마땅한 연주자는 물론 색소폰 교본조차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루 두시간씩 두달간 쉬지 않고 부니까 동요 한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됐죠.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뒤부터 밤무대 연주인들을 찾아다니고 관련 책도 보면서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그는 연주인들이 가르쳐 주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마지못해 시범연주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뒤 아랫 입술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색소폰을 불고 또 불었다. 몇달간의 연습 끝에 그는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우연히 한국연예협회에서 주관하는 연주인 선발 오디션에 신청, 거뜬히 합격했다. 그는 현재 한국연예협회 연주분과위원으로 등록돼 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2시간씩 자신의 집 2층 작은 방 음악실에서 색소폰을 분다.

처음에는 "시끄럽다"고 항의하던 이웃들도 이제는 색소폰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오늘은 왜 색소폰을 안부느냐"고 궁금해 할 정도로 귀에 익었다.

"밤무대에서 연주를 해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지만 교사라는 직분을 의식해 응하지는 않았죠. 거절하면서도 기분은 좋았습니다.밤무대에서 능력없는 연주자를 부르기나 합니까."

그는 색소폰에 몰두하면서도 수업은 한치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색소폰에 미쳐 학생들 가르치는데 소홀히 한다"는 말이 나올까봐 학교 일은 더 신경을 쏟는다. 3학년 담임만 15차례나 맡았고 학생부장·교육정보부장 등 시간을 많이 뺏기고 귀찮은 일이 많은 학교보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면서 '아름다운 외도'를 하는 셈입니다."

색소폰을 불다보니 다른 악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플루트·클라리넷·기타는 물론 대금·단소·피리 등을 섭렵했다. 이들 악기도 모두 독학으로 익혔다.

"악기끼리는 연주법에 연관성이 있어 색소폰에 통달하면 다른 악기도 배우기가 쉬워요. 기타 실력은 거의 프로급이라고 자신합니다."

그는 악기를 다루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지난 5월에는 독집음반을 냈다.직접 작사·작곡한 트로트·블루스풍의 대중가요 11곡을 자비로 음반에 담았다.음반의 타이틀곡인 '남자의 노래'는 간혹 라디오 방송을 타기도 한다. 음반 출반을 계기로 기회가 닿으면 가수로도 활동할 생각도 하고 있다.

그는 색소폰뿐만 아니고 서화에도 경지에 오른 '만능예술꾼'이다. 80년대 초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림 실력도 한국미술대전 연속 입선(91,92년), 한국 서화대전 특선(91년)으로 실력을 입증받았을 정도로 뛰어나다. 개인전도 두번이나 연 '화가'다. 그는 요즘 틈틈이 지역에서 주최하는 소규모 음악회에 나가 색소폰을 들려준다. 노인대학을 방문해 흘러간 옛노래를 연주하면서 노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그는 요즘 오는 11월로 예정된 개인콘서트 준비하랴 내년에 여는 개인전을 기획하랴 눈이 핑핑 돌 정도다.

그의 꿈은 50평 규모의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국화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그 카페에서 단골 손님들에게 색소폰을 연주하며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내 색소폰 연주를 카페 손님들이 기분좋게 감상하면 더 이상 행복한 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색소폰 부는 재미가 없으면 하루도 못살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김관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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