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동시에 대규모로 … 김정일 자금 ‘스텔스 동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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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북 금융제재 카드를 다시 빼들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21일 대북 추가 금융제재를 공식화한 데 이어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차관보는 22일 “2주일 안에 패키지 대북 제재에 착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미 해외에 예치된 북한 불법자금 계좌 100여 개에 대한 자금 동결 조치에 나선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미국이 앞으로 6자회담을 추진하는 대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태도가 납득할 수준으로 바뀔 때까지 압박하는 쪽으로 대북 정책 기조를 잡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섣불리 대화 국면으로 전환할 경우 북한에 천안함 사건의 면죄부만 줘 또 다른 군사도발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의미 있는 비핵화 진전도 얻어내지 못한 채 북한의 ‘평화체제 회담’ 공세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은 그동안 축적된 금융제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법 북한 계좌에 대한 ‘조용한 동결’ 방식을 적용해 주목된다. 미국은 2005년 북한 김정일의 통치자금 계좌가 있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 때는 관보를 통해 이 은행을 ‘돈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목했다.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마카오 당국은 결국 북한 자금 2500만 달러를 동결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금융은 피와 같다. 이것이 멈추면 심장도 멎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확실한 효과를 냈다. 하지만 마카오 당국과 중국의 반발을 불렀다. 부작용이 만만찮았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이번엔 BDA 방식처럼 효과는 강하면서도 부작용은 덜한 새로운 방식의 제재를 추진 중인 것으로 관측된다. 2005년에 비해 미국의 추적 대상이 확대된 점도 주목거리다. 동남아, 남부 유럽, 중동 지역의 10여 개 은행에 예치돼 있는 김정일 통치자금과 불법자금 계좌가 표적이다.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내용은 8월 초 방한할 로버트 아인혼 미 대북제재조정관을 통해 구체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과 유럽연합(EU)도 미국의 추가 금융제재에 따른 조치를 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이 22일 “금융제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 위반”이라고 반발하고 나선 것은 그만큼 금융제재의 파괴력이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은 2005년 BDA 제재 당시 “제재의 모자를 쓰고는 대화할 수 없다”며 6자회담을 장기 거부했고, 이듬해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5년 만에 또다시 금융제재를 놓고 한·미·일과 북한 간에 신경전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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