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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8>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2.작곡가 김호길선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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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드라마曲 '진고개 신사'로 인연

'월급봉투'는 심의 걸려 販禁

최고의 히트곡 '하숙생'만들어

"미련없이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아련히 떠오르는 그 여인의 얼굴을/별마다 새겨보는 별마다 새겨보는/아~, 진고개 신사."

1963년 내가 부른 '진고개 신사'다. 아직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찾는 팬들이 있는 걸 보면 범작(凡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노래인 '뜨거운 침묵'의 노랫말을 지은 심영식이 작사했다. 작곡은 나의 최고 히트작 '하숙생'(66년)을 만든 김호길 선생이 했다. 그와 첫 만남이었다.

'진고개 신사'는 MBC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이다. 진고개는 옛날 충무로 인근의 지명이다. 어릴적 실명했다가 20여년 뒤 개안수술을 받은 한 청년이 엮는 멜로드라마였다 .

나에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처음 부른 드라마 주제곡이기 때문이다. 이후 들이닥칠 드라마와 영화 주제곡의 전성시대를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은 조남사 작사·손석우 작곡, 안다성·송민도 노래인 '청실홍실'이 아닌가 한다. "청실 홍실 엮어서 정성을 들여…" 1956년 KBS 드라마로 인기가 대단했다.

원래 '진고개 신사'는 다른 가수가 먼저 불렀다. 두어 번 방송을 탔으나,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는지 나에게 노래가 떨어졌다. 지금의 인사동 사거리에 있던 동일가구 건물 안의 MBC 스튜디오에서 부리나케 녹음을 했다.

이 '진고개 신사'가 인연이 돼 나는 김선생과 '하숙생'을 만들 수 있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나는 가수 초년 시절 너무나 좋은 분을 많이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손석우·김호길·이봉조·김강섭 등. 내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었다.

당시 김선생에 대한 가수 김상희의 평이 기억에 남는다. "김선생님은 남자지만 혹독한 친정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혹독한 시어머니가 아닌 친정 어머니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낳아주신 어머니처럼 어려운 문제도 스스럼없이 상의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사실 나에게도 그런 존재였다.

당시 작곡가의 대우는 그리 대단한 것은 못되었다. 군복에 검은색 물을 들여 입고 다니던 게 시대의 서글픈 패션이었다. 그러니 작곡가라고 형편이 나을 리 없었다. 노래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으로 버티던 궁핍의 세월이었다.

그래도 당시의 가요들은 희망을 노래했다. 가요는 잘 살아 보고 싶은 서민들의 애환을 위로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아마 우리 민족은 고단함을 즐거움으로 풀어내는 특이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진고개 신사'도 그런 즐거움에 일조했다.

김선생의 두번째 곡은 '월급봉투'였다. 지금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지만, 이 노래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가사가 문제였다.

"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가/월급날은 남몰래 한숨을 쉰다/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남는 건 빈 봉투/한숨으로 봉투 속을 채워나 보세."

이게 가요 심의에 걸린 것이다. "'남한은 이처럼 못산다'며 북한에 역이용 당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노래가 나온 지 1년 후에 금지에 묶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63~64년 무렵의 일이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 극심하던 때라 이같은 창작 침해는 심한 편이었다. 반공(反共)이 우선이던 시기여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창작의 자유' 운운하는 것은 한가한 일일 뿐이었다.

아무튼 '진고개 신사'의 성공으로 나는 방송과 영화계의 주목 대상으로 떠올랐다. 주마가편(走馬加鞭),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격이랄까. 드라마 주제곡을 자주 부르면서 인기는 더욱 솟구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드라마는 재방송까지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첫 방송 시작 전과 후,재방 시작 전과 후. 미디어라 해야 라디오가 거의 전부였던 시기에 이처럼 하루에 네번씩이나 전파를 탈 수 있었으니 가수의 인기가 치솟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주제곡은 1분 10~20초 안에 1절을 처리해야 했다. 이처럼 짧은 것도 엄청난 장점이었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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