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연출로 빚어낸 우리네 삶의 밑바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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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국립극단이 가족을 소재로 한 연작 공연으로 여름 무대를 정리한다. 특정 주제를 잡아 페스티벌 형식으로 꾸미는 이런 연작 공연은 처음 있는 시도다.

한달 동안 차례로 무대에 오를 '가족극'은 모두 세 편이다. 장성희 작·김영환 연출의 '길 위의 가족'(27일~9월 1일), 박근형 작·연출의 '집'(9월 4~10일), 최인호 작·최용훈 연출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9월 14~27일)가 그것이다.

이번 연작 무대의 특징을 한 단어로 아우르면 '파격'이다. 주로 서양의 대형 고전극이나 무거운 주제의 창작극에 빠져 있던 국립극단이 대학로의 자유분방한 바람을 수용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50대의 김영환과 '386세대'인 박근형·최용훈 등 소위 방외(方外)의 인물들이 연출을 맡아 새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파격은 또 있다. 최고령 배우 장민호(78)는 물론 국립극단 배우 전원이 세 작품 중 한 군데 이상에 모습을 보인다.

캐스팅 되지 않으면 뒷짐지고 지켜나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 가운데 '길 위의 가족' 출연자들은 달오름이나 해오름 등 중·대형의 프로시니엄(객석과 무대가 나눠진 서양식 극장)무대를 벗어나 실험극을 하던 달오름 극장에도 선다.

종래 국립극단은 권위의 상징으로 통했다. 작품의 주제는 늘 무겁고 고고했으며,배우의 어깨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액자형 프로시니엄 무대는 배우들을 사실상 틀에 가두는 '감옥'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결과는 '구태의연하다'라는 평가로 모아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번 가족극 연작 무대는 우리네 삶의 밑바닥을 훑는다. 그러면서 연출마다 다른 3인 3색의 무늬를 보여주어 단조롭다는 선입견을 깨려고 힘썼다. 한마디로 '의미있는 일상의 포착'이라는 표현이 썩 잘 어울린다.

이런 조율사 역할을 한 사람이 김철리 예술감독이다. 그는 자기 논지가 분명한 대학로의 '연극 논객'인데 올해 초 50여년 국립극단의 역사상 첫 상임 예술감독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초반엔 국립극단의 단원들과 불화도 있었으나 이제 잘 수습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환골탈태한 '김철리 스타일' 연극이 나올지 관심이 쏠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공연 선진국에서 흔히 예술감독은 단체의 컬러를 좌지우지하는 최고 결정권자다. 그러나 단장의 견제를 의식해야 하는 국립극단에서는 그런 전권을 행사할 수는 없는 처지다.

그러나 점차 예술감독의 역할을 인정하는 추세여서,이번 무대는 '달라지고 있는 우리 연극계의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기도 하다.

평론가 출신 작가 장성희가 쓴 '길 위의 가족'은 2년 만에 소풍나온 한 가족 삼대(三代)의 이야기다. 비록 해체 직전에 몰린 가족이지만 끝까지 행복을 보듬고 살려는 선한 의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이문수·김재건·권복순·김종구 등이 출연한다.

1999년 '청춘예찬'으로 일약 대학로의 총아로 떠오른 박근형이 쓰고 연출한 '길'은 한 가족의 이면 풍경을 생짜로 담았다. 시인을 꿈꾸는 아버지, 손찌검을 해대는 남편을 피해 친정으로 피신한 누나, 찜질기 판매원인 '나', 깡패 출신 건달 매형 등 개성이 뚜렷한 인물이 등장한다. 오영수·이혜경·우상전 등이 출연한다.

마지막으로 선보일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는 중견 소설가 최인호가 96년 탈고한 자전적인 희곡이다. 두 작품에 비해 분위기는 경쾌하고 활기차다.

이상직·최원석·노석채·남유선·계미경·곽명화 등 젊은 배우들의 포진이 두드러진다. 주인공인 작가(나레이터)가 10년 전 별세한 어머니를 회고하는 형식을 취했다. 02-2274-3507~8.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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