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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 - 公敵 자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 사회에서 공적(公的)자금은 어느 새 '공적(公敵)자금'이 되어버렸다.

외환위기 때 금융이 통째로 주저앉아버리는 것을 막으려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할 수 없이 들어간 돈이라는 생각은 별로 없고, 외환위기를 불러 온 '공공의 적'들 때문에 공연히 들어간 돈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있다.

그 '공공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 중 몇이 최근 필자를 찾아왔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도 답답해 하소연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었다.

"죄인이 무슨 할 소리가 있겠습니까만…"하고 운을 뗀 사연은 이랬다.

우리는 평생을 건설회사에서 일하다 은퇴한 60대의 중늙은이들이다. 외환위기 속에서 회사가 넘어갈 때 우리는 임원이었다. 그러나 말이 임원이었지 이사회 한번 들어간 적이 없었다. 나는 총무 담당이었고, 저 사람은 해외지사에 있었으니까. 당연히 회계고 자금이고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물론 전 재산을 날릴지 모를 민사소송에 걸릴 판이다. 이게 평생 일한 대가인가. 공적자금 회수가 중요하다는 건 안다. 그러나 왜 내 재산이 공적자금 갚는 데 들어가야 하는가-.

이들이 '공공의 적'으로 몰린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가 넘어가기까지 문제가 많았던 이사회 결의가 여럿 있었는데, 그 서류에 이들의 도장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개개인의 잘잘못을 가려 '임원으로서 기업에 끼친 손해를 물어내라'는 민사소송 여부를 사실상 결정하는 예금보험공사의 대답 또한 간단하다.

"개개인이 주장하는 억울한 사정에 대한 소명 자료는 다 받는다. 문제가 되는 이사회 결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으면 민사소송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장이 찍혀있는 한 '이사로서의 임무를 해태(懈怠)'한 법리적 책임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예금보험공사는 골치 아픈 판단을 법원에 넘기는 셈이다. 감사원 감사를 받아야하는 예금보험공사도 '임무를 해태'했다는 지적을 받지 않아야 할 터이니까.

이런 '공공의 적'도 있다.

그는 외환위기 직전까지 보증보험 기관의 사장이었다. 그가 사장으로 있을 때 보증을 해주었던 기업들 중 몇몇은 훗날 당연히( ! ) 부도가 났다. 그 부도기업 중 하나에 대한 보증을 사장으로서 결정한 것이 형사고발 대상이 되었다. 계좌를 다 뒤졌으나 비리 혐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1심에서의 무죄가 2심에서는 유죄로 뒤집어졌고, 그는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외환위기 이전 웬만한 기업의 이사회가 어떠했는지를 다들 잘 알고 있다.

총수가 어떤 결정을 내리면 이사회는 형식이었고,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사의 발언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사회의 기능과 이사의 임무에 대해 원칙대로의 기준을 세우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데도 없는 당시의 임원들을 '법리적 책임'만으로 싸잡아 재산을 내놓으라는 것은 '시대를 잘못 만난 죄'를 묻는 것과 같다.

금융기관 책임자의 '업무상 판단'을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으면 누가 책임지고 기업의 신용을 판단해 대출이나 보증을 결정하려 할까.

금리는 왜 물리고, 리스크 매니지먼트 기법은 왜 필요한가. 그렇지 않아도 주택담보 대출이 급증하는 금융현실을 두고 어떤 이는 "이러다간 은행이 전당포 장사나 할 판"이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급하게 공적자금을 끌어다 쓸 때는 네돈 내돈을 따질 새도 없었다. 그러나 급한 불 끄고 빚잔치 할 때가 되자 그간 다들 득을 본 돈 쓰임새는 어디론가 가고, 다들 '공공의 적'을 찾고 있다.

기업·금융권 밖에는 더 큰 '공공의 적'들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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