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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시절 그림' 감상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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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음식에 시절 음식이 있다면 그림에도 시절 그림이 있다. 딱히 시절을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제철 만나 더 깊은 맛을 내는 그런 그림들 말이다. 이를테면 '까치 호랑이 그림'은 희소식이 기다려지는 새해 벽두에 어울린다. 옛 사람들의 피서를 그린 '탁족도(濯足圖)'는 여름철이 제격이다. 세상에는 물론 철없는 그림이 훨씬 많다. 그래선지 철이 든 그림을 때맞춰 보는 맛은 자별하다.

찬 바람이 뼈에 스미는 이맘때면 뒤란에 묻어둔 김장 꺼내 먹듯 나 혼자 맛보는 그림들이 있다. 이럴 때 나는 나의 감상을 독식한다. 사실 겸상을 차린 감상만큼 불편한 꼴은 없다. 한 작품을 두고 서로 눈치 보며 의견을 나누는 일은 거북스럽다. 아마 전문가들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나의 독상에 맨 먼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올린다. 한국 사람 모두가 아는 국보를 '시절 그림'으로 감상하자니 열없기는 하다. 그래도 이 그림에서만큼 차고 시린 날의 교훈이 뼈에 저린 것도 없을 성싶다. 발문에서 추사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다. "한겨울이 되어서야 송백이 뒤에 시듦을 안다." 추사는 자신을 돌봐준 제자 이상적의 한결같음을 칭송하고자 그 말을 했다. 그러나 녹음의 계절에는 소나무와 전나무의 푸름도 시답잖게 보이는 것이 염량세태다. 헐벗고 가난한 겨울이 되어서야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 비로소 도탑게 느껴지는 세상사에서 따습고 배부른 시절의 윤리는 한갓 허울에 그치기 쉽다. 추사 그림이 던지는 겨울 메시지를 나는 그렇게 들었다.

차고 시린 날의 그림 읽기에 능호관 이인상의 '설송도(雪松圖)'도 빠질 수 없다. 흰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소나무가 화면 중앙에 꼿꼿이 서있고 그 뒤로 허리 휘어진 소나무 하나가 더 그려진 작품이다. 능호관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만고풍상을 겪어내는 노송의 감연한 기개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계절과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늘 꼽히던 '설송도'는 몇 해 전 어느 기획전에 나와 다시 나를 사로잡았다. 희한하게도 그날 본 그림은 예전과 달랐다. 가혹한 겨울인 줄 알았던 화면에서 봄의 기미가 느껴졌던 것이다. 소나무의 몸통에 칠해진 촉촉하고도 윤기나는 먹색이 그날따라 유난히 눈을 찔렀고 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능호관은 겨울 속에서 봄을 예비한 화가였다. 봄은 늘 조산(早産)을 꿈꾼다. '설송도'는 시절의 순환을 꿰뚫어 본 그림이라 하겠다.

이 겨울 나는 십 여 년 전에 구했던 학산 윤제홍의 '자로부미도(子路負米圖)'를 잊지 않는다. 벌써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림은 생생히 기억한다. 흰 눈 가득 쌓인 산골에 집 한 채가 있고, 한 소년이 등에 쌀을 지고 그 집을 찾아가는 정경이었다. 마치 G펜으로 쓴 듯한 학산 특유의 서체가 화면 위쪽에 보이는데 이 그림을 그린 사정이 적혀 있다. 양식이 떨어진 조카가 쌀을 구하러 눈보라를 헤치며 학산에게 왔다. 학산은 기가 막혔다. 그도 쌀뒤주가 빈지 오래였다. 쌀 대신 이 그림을 그려주며 숙질이 함께 울었다고 했다. 학산은 조카에게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집이 가난해 백리 밖에서 쌀장수를 하며 부모를 공양했고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고사다. 쌀 대신 그림에 담긴 뜻으로 시장기를 달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산의 조카가 그림을 팔면서 또 한 번 울지 않았기를 나는 빈다.

당나라 장언원이 지은 '역대명화기'는 첫 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회화는 가르쳐서 일깨우고 인륜을 돕는다. 하늘의 변화를 궁구하고 사물의 미세함을 헤아린다." 시절 그림으로 내가 맛본 그림들이 다 그러하니 겨울은 역시 감계(鑑戒)의 계절인가 보다.

우찬규 학고재 대표

◆약력:화랑 학고재 및 도서출판 학고재 대표, ㈜아트컨설팅서울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