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포도주 재테크'막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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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히틀러만큼 측근들에 의해 수집벽과 돈에 대한 집착이 조직적으로 은폐돼 있던 인물도 흔치 않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독재자이긴 하지만 금욕적이고 검약했다는 이미지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기이한 인물이 미술품말고도 포도주 50만병을 동굴에 가득채워 놓을 정도로 포도주에 혈안이 돼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히틀러의 음흉스러운 치부(致富)는 올해초 출간된 『히틀러와 돈』(참솔)에서 자세히 밝혀지고 있다. 히틀러는 여성 조력자들에게 보석을 선물받고 미술진품을 수집해 비싼 값에 되팔며 자신의 초상권까지 관리하는 치밀한 인간이었다.

이런 히틀러의 과욕때문에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는 영토 분쟁말고도 또다른 전쟁이 벌어졌다. 이름하여 포도주 전선(생산 지역)에서 벌어지던 포도주 쟁탈전. 발단은 최고급 프랑스 와인을 맛보고도 "저급한 식초나 다름없군"이라고 평했다던 미각이 둔한 히틀러가 포도주의 투자 가치를 알아보면서부터 였다. 히틀러는 '군복을 입은 포도주상'이란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특수부대를 포도주 총통이라 불렀다는데 이들은 프랑스산 고급 포도주를 사들여 독일로 보내고 포도주에 큰 이윤을 붙여 국제 시장에 내다팔아 전쟁 경비를 조달했다고 한다.

이 책은 프랑스의 유명 포도주 산지인 부르고뉴·알자스·루아르 계곡·보르도·샹파뉴의 포도주 가문 다섯 곳의 전쟁 경험담을 토대로 하고 있다. 글쓴이들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작가들이며 TV 기자 출신인 남편 돈은 에미상을 세차례나 받았다. 평소 포도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제2차세계대전 체험자들을 접하다 보니 나치 독일에 얽힌 포도주 비화가 한편의 소설같아 심층 취재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은 히틀러가 아니라 프랑스 포도주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포도 재배자들이다.

이들 재배자가 포도주를 한병이라도 구하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집안의 특상품 포도주를 동굴 한쪽에 숨기고, 온가족이 매달려 벽돌로 벽을 만들고 거미를 풀어 마치 오래된 벽처럼 꾸미는 방법 정도는 예사였다. 전쟁 당시에는 열차 화물 탈취도 자주 일어났다. 독일군에게 빼앗긴 프랑스 포도주를 되찾기 위해 농부·포도 재배자·철도 직원들이 합세해 독일로 가는 화물을 조직적으로 약탈했기 때문이다.

또 독일 병사들이 저장고에 넣어둔 포도주통의 술을 물과 밤새 바꿔치기한 사례도 있다. 이런 숨기기·되훔치기뿐만 아니라 포도 찌꺼기에 물을 타 저급 포도주를 만드는 속이기도 횡행했다. 포도주가 직접 레지스탕스 운동에 뛰어든 경우도 있었다. 포도주통 속에 사람을 숨기는 방식으로 점령 지역 안과 밖으로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을 수송하는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포도주에 대한 프랑스인의 사랑 때문이었다니 당시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목숨을 건 사투였겠지만 지금은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위트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도주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히틀러가 자신의 후계자 괴링에게 징발 임무 총책을 맡기고 일류 레스토랑에 프랑스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물론 레스토랑의 포도주 저장고는 독일인 고객을 위해서만 열려 있었다. 프랑스인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당시 프랑스 포도주제조업자협회는 "노인과 환자는 포도주가 필요하다. 포도주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음식물 중 장수를 보장하는 최고의 영약이다"라고 밝혔다는데 이 발언은 프랑스인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이 책은 프랑스인의 지독한 포도주 사랑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보이며 그들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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