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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만 파는 백화점 러시아 신흥부자 북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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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모스크바 마네즈 광장의 지하백화점은 지하 3층에 연면적 4만8천㎡에 이르는 모스크바의 명물.

루이뷔통·샤넬·구찌·겐조 등 1백여개가 넘는 점포 모두가 호화 해외브랜드만 취급하는 백화점이 크렘린·붉은 광장과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러시아의 급속한 변화를 실감케 한다.

지난달 31일 휴가철에다 평일 오후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백화점은 멋쟁이 러시아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쇼핑을 즐기는 이들이 바로 수십만 루블(수백만원)짜리 명품을 신용카드로 구매하는 러시아 신흥부자 '노비예 루스키(신러시아인)'들이다. 자본주의 선진국의 호화 백화점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개혁은 지난 3년간 평균 6.5%의 고성장을 기록하며 본궤도에 접어들었다.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은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

모스크바대 이르쿠츠크 분교에서 재정학을 전공하는 애나 알렉산드로바(22)는 "MBA 과정을 마친 뒤 외국계 투자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79억달러(약 10조원)의 재산을 모아 러시아 최대 부호가 된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38)는 젊은이들의 우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혁이 장밋빛으로 가득찬 것만은 아니다. 급격한 체제변환은 사회 곳곳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 부족. 러시아의 실업자는 1999년 최고 1천만명에서 올 초 6백만명까지 떨어졌지만 실업률은 8%대에 이른다. 일자리를 가진 다수 국민도 생계비 이하의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미냐 모랄레프(25)는 러시아 철도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지난 5월 사직했다. 그는 "4천5백루블(18만원)의 월급으로는 아파트 임대료는커녕 식료품값도 대기 버거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당장 나은 일자리를 찾기도 힘든 상황이다.

98년 경제위기 이후 물가는 두세배로 치솟았지만 근로자 평균 월급은 3천6백루블(15만원). 모스크바 시내 한인식당의 불고기백반 값이 3백루블인 것을 감안하면 모랄레프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성세대 중에는 구소련체제에 대한 향수를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사람이 많다. 모스크바 전승기념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엘리자베스(62)는 "우리는 옛날에 정부가 주거·의료·식료품을 모두 해결해주는 휼륭한 시스템을 만들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몇배 더 힘들게 일하지만 먹고 사는 게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러시아의 노년층 연금생활자 3천8백만명도 매달 평균연금 1천2백40루블(4만9천원)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형편이다.

노보시비르스크=정효식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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